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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GE Apr 22. 2020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산문집


B가 내게 물었다. 나이가 들면서 바뀐 것이 있다면 무엇을 꼽겠냐고. 조금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네가 한 질문을 듣고 ㅡ그 짧은 순간에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들을 골라ㅡ 적절한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조금 더 망설이다

아니,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라고 덧대며 말끝을 흐렸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돌리고 돌려 내려놓고, 그 내려놓은 말의 의중을 살피다 마는 그런 시간들이 많아지고 있다. 시간을 지나올수록 자꾸 외롭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는 날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싶어졌다. 의미 없는 말들은 아주 쉽게 쏟아내고 진심에 가까운 말들은 휴대폰 깊숙한 곳에 적어 놓는다. 입으로 뱉지 않고 적는 날이 많아졌다.


그늘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p.11)


외롭고 허기졌다. 시간이 잘 가는데 또 시간이 안갔다. 글을 읽는 것보다 시각적인 것에 의존하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거의 보지 않던 드라마들을 보다 <이번생은 처음이라>에서 박 준 작가의 책을 보고 말았다.


박 준 작가는 6년 전에 시집으로 만났다. 분명 시집은 어려웠고 나는 또 시집 앞에서 많이 망설였을텐데 ㅡ그래서 그랬을까?ㅡ 옅어질 법도 한 그의 이름이 내게 남은건, 드라마에서 나온 박 준이라는 이름이 그토록 반가웠던 건 그때 그 망설임때문이었을까. 그가 찍어낸 글들을 손 끝으로 만지며 읽고 싶어 그 자리에서 바로 책을 주문했다. (출근하고 시간이 좀 남아 바로 주문했는데 당일 오후에 회사로 책이 와서 다시 한번 우리 나라 택배 시스템에 놀람!)


그들이 유서조차 남기지 못한, 그래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분노와 슬픔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든 세상에서 우리는 잘도 살아간다. 사람이 사람을 잃는 세상, 노동이 노동을 잃은 세상, 법이 법을 잃고 강이 맑음을 잃는 세상에서, 도처가 죽음으로 가득하지만 애도와 슬픔에까지 정치성을 들이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p.183)


산문집인데 시인이라 그런지 문장 사이에 여백이 많은 것도 좋았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와 같은 특유의 문체들도 좋았다. 요즘 짧은 필사를 하고 있는데 이 책은 전체 필사를 할 예정이다. 그만큼 모든 문장이 좋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글들 사이에서도 그가 버티겠다고 꿋꿋하게 서있는 두 다리가 보인다. 흐린 하늘에서도 별을 찾겠다며 두리번 거리는 것 같은 글들이 좋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이런 글들을 쓸 수 있는 사람 조차도 오늘이 외롭구나 느껴지는 것이 좋았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낸, 아니 보내려고 애쓴 그의 모든 문장들이 내게 닿았고 위로가 되었다. 또 그렇게 나는 글이 쓰고 싶어진다.


목요일 저녁 그녀와 먹는 술자리에서 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선물 할 예정이다. 이 책이 그녀의 마음에 닿아 그녀의 날들 전체가 위로 받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다 괜찮다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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