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정이 끝나가는 연말에 하는 강의는 뭘 해도 망하기 쉽다.
게다가 페미니즘을 주제로 남자 고등학교라면 망하지 않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강의 일정은 12월 26일이었고 의뢰는 대략 한 달도 더 전부터 연락이 왔다. 남자 청소년을 대상으로 페미니즘 이해를 돕는 교육을 시도해보고 싶은데, 반감을 고려하여 자기돌봄을 주제로 이야기해보면 어떻겠냐는 상세하고도 사려깊은 고민을 담은 의뢰 메일이었다. 안그래도 때마침 양평원에서 자기돌봄을 주제로 강의 매뉴얼을 만들었기도 해서 냉큼 강의를 수락하고 강의안을 만들었다.
시작에는 연말 붕 뜬 분위기를 잡기 위해, 성인이 되고나서 하고 싶은 것을 물었다. 연애, 음주, 운전 등과 더불어 독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냉큼 이야기를 받아 처음 독립 했을 때 이야기를 했다. 온전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 샤워하고 발가벗고 나왔을 때의 홀가분함, 친구들을 초대하며 즐기는 집들이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독립의 기쁨 같은 것들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어서 맞닥뜨린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밀린 빨래를 하기 위해 세탁기 앞에 섰는데, 세탁용 세제와 중성세제, 섬유유연제 앞에서 느낀 당혹감, 겨우 빨래를 했는데 아끼는 옷이 손바닥만해졌을 때, 얼룩덜룩 이염 됐을 때 느꼈던 좌절감… 뭐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분명 우리 일상에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요소인데 왜 이토록 우리는 자기돌봄에 무지했나. 질문을 던지며 하나씩 자기돌봄 개념을 설명했다.
이 때 쯤, 슬슬 지루해질 것을 고려해서 우리의 일상을 점검하는 질문을 던졌다. 이를테면, ‘나는 감정표현을 잘 하면서 살고 있다’, ‘주변에 고민을 털어 놓을 사람이 있다’, ‘스스로 빨래, 요리를 할 수 있다’, ‘우리동네 분리수거 방법과 일정을 알고 있다’와 같은 질문을 5점 척도로 물었다. 25점 만점에 대다수가 10점 중반대. 2차 방정식은 풀어도 마음 속 꼬인 질문들은 풀지 못하는 우리네 삶.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갈까? 자기계발은 흔해도 자기돌봄은 등한시 되어온 사회를 살피고 그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알아봤다. 대표적으로는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심리적, 신체적 문제들이 있었다. 실로 기분장애 진료인원 중 가장 많은 비율이 20대였고 5대 암 관련해서 가장 급격한 증가율을 보이는 것도 청년세대였다. 남자 청소년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남성들의 자기돌봄 부족으로 인한 문제들도 언급했다. 이를테면 더 높은 흡연률, 폭음, 자살 문제 같은 것. 또 중년 남성의 고독사 문제 역시 이들이 눈여겨 본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풀어놨다. 가부장적인 남성성의 영향으로 인해 감정표현에 서툴고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지난날, 그렇게 일상을 간과하고 살아가다 결국 공황을 겪은 후에야 자기돌봄을 돌아보게 되었음을 이야기하며 이런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왜 이렇게 돌봄을 등한시하게 됐을까? 산업화와 함께 만들어진 성별분업,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금 우리사회에도 여전히 그 자장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시도를 언급했다. 이를테면 젠더규범을 해체하기 위한 ‘맨박스’라던가 남성의 돌봄을 이야기하는 많은 책과 사람에 대해 보여주며 페미니즘이 어떻게 남성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마이클 코프먼의 책 구절이 큰 도움이 됐다.
“모든 인간은 타인이 벌이는 인간 해방 운동에 빚을 지고 있다. (...) 모든 남성은 1970년대와 80년대의 동성애자 해방운동과 오늘날의 LGBTQ+ 운동에 감사해야 한다. 이 운동은 욕구와 사랑의 대상을 개인이 정의할 수 있다는 점을 새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누구든 우리를 지배하고 가두는 젠더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_마이클 코프먼, <남성은 여성에 대한 전쟁을 멈출 수 있다> 중에서
마무리는 자기돌봄의 다양한 영역에 대해 각자 점수를 매겨보고 그것을 함께 이야기 나누며 보완이 필요한 영역을 찾아보고 노하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자기돌봄이 비단 개인의 능력으로 한정되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사회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이야기하게끔 했다.
처음 사용하는 강의안이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참여자들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귀기울여 잘 들어줘서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사실 좀 반성했다. 앞서 언급했듯, 연말에 남자 고등학교에서 진행하는 교육이라는 생각에 편견이 생겨서, 그냥 연애 이야기나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다. 막상 게으른 건 나였다. 이 학교는 선생님과 관계도 좋고 이전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충분히 했던건지 소감과 질문 수준도 높았다. 한 청소년은 우리사회의 성차별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며 자신을 비롯한 많은 남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이렇게 사회문제와 엮어서 이야기할 수 있음에 신기해 했고, 또 다른 청소년은 언론에서 ‘갈등’만 부각되는 이 현실 문제를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나는 다시금 언론의 ‘갈등’ 프레임을 문제 지적하며,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낸 변화의 역사를 이야기한 후,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인식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남성들의 변화와 개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했다.
교육이 끝나고 담당 선생님이 참여자의 후기를 전해주셨다. 진짜 하나하나 다 너무 감동이라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 이 맛에 강의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다. 이런 목소리들을 인터뷰를 하거나 교육 때 조금씩 모아서 이들의 필요에 맞는 교육 개발로 이어지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남자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이 교육자들에게도 다시금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라, 이런 분석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남성들에게 연애나 자기돌봄과 같은 매개를 통해 페미니즘을 전달하는게 필요했던 것 같다. 원론적이고 교조적으로 전달하기보다 필요로 시작해서, 그 운동의 의미로까지 나아가는게 어쩌면 더 자연스럽고 저항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이번 교육 대상의 경우 독립 경험이 거의 없는 청소년들이었던지라, 자기돌봄의 일부 개념, 이를테면 가사노동, 환경돌봄 같은 것들이 막연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면 훨씬 더 솔직하고 심도 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마지막 강의가 너무 좋아버렸다.
내년이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