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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Jun 29. 2018

나는 OOO 입니다.

트래블러 번외 편 : 로이를 기억하는 자들

나는 나탈리아 입니다.


에고르는 매년 추운 겨울이 시작되기 전, 나와 일주일간의 기차여행을 떠나요. 그가 이 여행을 위해 매달 조금씩 돈을 모은다는 것을 알고 있죠. 내가 어리다고 그의 노력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에고르와 나는 모스크바에 살아요. 가구들이 가득 차 있는 곳에서요. 이곳에는 신기한 가구들이 많아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는 가구들과 함께 자랐어요.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꽃 모양이 그려져 있는 패브릭 소파예요. 소파에 손바닥을 올리고 두 번 탕탕 친 뒤에 코를 가져다가 킁킁대면 좋은 향기가 나요. 사람들은 그걸 모르죠.


이 소파는 나 보다 더 오래 이 곳에 있었던 것 같아요. 에고르는 늘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소파를 소개하죠. 하지만 늘 그들은 이 소파에 관심이 없어요. 그럴 때마다 에고르는 나를 보며 한 숨을 쉬지만, 난 미소로 답하죠. 혹시 누군가 이 소파에 관심을 보이고 데려간다면, 난 울지도 몰라요. 이 소파가 없어지면, 에고르와 함께하는 기차여행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그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서 사 먹는 맛있는 체리보다 나는 이 소파가 더 좋답니다.


에고르는 세상에서 내가 체리를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아요. 그렇지만 나는 이 소파가 제일 좋고, 그다음에 에고르! 아! 그런데 지난달 기차 안에서 만난 어떤 아저씨가 사준 체리는 빼고요. 만약에 그 아저씨가 다시 그 체리를 들고 나에게 온다면, 이 소파를 주고 싶어요.




나는 붉은 립스틱의 여자 입니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물건을 하나 골라보라고요? 나만의 아이덴티티라… 당연히 립스틱이죠! 이건 비밀인데 제 입술색은 피부색과 그리 구분이 되지 않아요. 인간의 가장 예민하면서도 섬세하고 매력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부위가 입술 아닌가요? 그런데 그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어요. 최대한 드러내야죠. 나 여기 있어요! 하면서 당당하게 보여줘야죠.


저는 남자가 바뀔 때마다 립스틱을 구매해요. 맞아요. 꽤 많은 양의 립스틱이 있네요. 어디 보자. 기본적으로 핸드백에는 늘 있고요, 화장대, 욕실, 여기 차 안에도 있네요. 색이 진 할수록 자존감이 오르는 것 같아요. 채도가 낮은 건 잘 바르지 않고, 주로 정열적인 붉은 계통을 선호해요. 작년에 만난 남자는 오렌지색을 좋아한다 길래 한동안 어울리지도 않는 색을 바르고 다녔네요. 그와는 오래 못 갔어요. 오렌지 색 계통의 립스틱을 고를 때부터 별로였다니까요. 지금 바르고 있는 색이요?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역시 저는 붉은 립스틱이 맞는 거 같아요.


이건 2달 전에 만난 남자한테서 받은 선물인데, 그는 이 립스틱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네요. 눈꼬리가 처지며 웃던 남자였는데…… 미련이요? 그런 건 없어요. 세상에 남자는 많잖아요. 모든 남자들이 절 원하는데! 세상에 남자는 두 부류로 나뉘죠. 나와 자고 싶어 접근하는 사람, 나와 자고 싶지만 참는 사람. 여하간 지나간 것은 추억일 뿐이에요. 이렇게 립스틱을 바를 때마다 가끔 떠오르는 지나간 존재들. 그런데 난 왜 이름이 없죠?




나는 링고 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달콤하고도 쓸쓸합니다.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더 그렇습니다. 그건 때로는 사랑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처로 남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머릿속의 생각과 다른 언어가 튀어나오기도 해서 스스로가 깜짝 놀라기도 하고, 공기를 만난 그 언어 때문에  생각이 정말 그러했던 건지 어느 순간부터는 헷갈리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우리가 진짜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가 말을 할 때 스스로가 말하는 대로 생각한다고 느낀다. 허나 그것을 느끼는 순간, 고집스럽게 정반대를 생각하기도 한다고요. 그런 면에서 저는 제 방식대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정으로, 그리고 눈빛으로 그것을 대신합니다.


머리를 당신 얼굴 가까이에 들이대면 그건 저를 따뜻하게 안아달라는 얘기입니다. 단지 그것뿐이니 당신의 포근한 가슴을 저에게 내어 주시겠습니까? 눈썹을 치켜뜨고 콧방울을 움찔거리는 건 당황스러울 때 짓는 표정이니 저를 너무 나무라거나 외면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촉촉한 눈빛으로 지극히 당신을 바라보는 건 저도 지금 당신이 느끼는 감정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침묵이 자리잡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더군요. 결국 저도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후회와 실수를 반복합니다. 훗날 당신도 누군가에게 행하게 될 것들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대문, 정원, 벽, 천장, 창문을 둘러봤습니다. 창문 너머에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네요. 어딘지 모르게 그와 닮아있는 빛깔입니다. 본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행위라고 하더군요. 오랫동안 햇살을 바라보며,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 볕을 쬐던 지난날을 떠올렸습니다. 그때 나누었던 감정들이 지금 이곳에 와있습니다. 그때의 시간이 지금 이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그와 함께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곳이라는 것을 한 번 더 상기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습게도 지금 제 엉덩이가 행복에 겨운 듯 실룩거리네요.


저는 종종 너무 기분이 좋을 때는 엉덩이를 흔들거나 그에게 얼굴을 비비고 제 모든 열정을 담아 혀를 놀립니다. 그럼 그는 제 얼굴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진 뒤 꽉 껴안아 줍니다. 그의 품 안에서 심장 소리를 들으면, 평온함이 느껴져요. 주변의 시끄럽게 들리던 소음도 사라지고 온전히 그의 심장 소리만이 남습니다. 가만히 규칙적인 그 소리에 집중하면, 어느덧 그 소리마저도 아늑히 멀어지고 포근한 정적이 우리 사이를 감쌉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 순간, 그 평온한 정적의 세상이 그립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이건 저의 환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환상을 꿈꾸지 않으면 시간은 결코 흐르지 않아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그와 함께하고 있지 않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그가 저를 보고 있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 인해 상처를 받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건 없을 겁니다. 슬퍼말아요. 인생에는 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걱정 말아요. 곧 그는 저를 대신할 누군가를 찾을 겁니다. 저는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그리고 부디 가능한 저를 빨리 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이제 잠이 옵니다. 아주 깊은 잠을 자게 될 것 같아요. 그만 거기 불을 좀 꺼주시겠습니까?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트래블러: 죽음에는 차별이 없다





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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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쓰인 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은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슬픔의 비의’를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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