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박 6일의 일정을 마치고, 드디어 파리를 떠나는 날입니다. 그동안 여행기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 5박 6일간 호스텔 방을 같이 한 사람의 행태에 저는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떠나는 오늘 드디어 제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화가 난다기보다는 헛웃음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파리를 떠나면서, 호스텔 4인실의 사람들 이야기를 다소 거친 형태의 일기로 옮겨봅니다.
7월 31일
- 파리 호스텔 도착.
8월 1일
- 오전, 매우 예민한 히피 스타일 남자(1번)가 아침부터 소음 내지 말라고 신경질 부림.
8월 2일
- 아침에 눈을 뜨니 한국인 여자(2번)가 여권을 잃어버렸다며 제발 도움을 달라고 함.
- 1번이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짜증내고, 나는 시간 없으니 방에서 이야기하지 말고 복도에서 짤막하게 이야기하자고 함. 내가 급하다는데도 2번은 씻고 나간다며 한참 걸림.
- 2번은 중요한 짐들을 잃어버렸는데 이전 호스텔의 라커룸에 넣어두고 온 것 같다고 이야기함. 락커룸도 열어야 하고 새로 체크인한 호스텔 비용까지 필요해서 30만 원을 입금해줄 테니 유로화를 뽑아달라고 함.
- 본인이 스스로 입금을 못하는지 자기 엄마한테 연락해서 입금을 부탁함. 본인 엄마 되시는 분이 계속 전화를 안 받자 내 앞에서 엄마 욕을 하기 시작함. 그 과정에서 내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음.
- ATM까지 가서 계좌로 입금받고 돈을 뽑아 주는 데까지 결국 1시간 가까이 걸림. 디즈니랜드행 셔틀 놓침. 예약비 증발함. 그 와중에 내가 지하철 타면 된다며 애써 괜찮은 척하자 지하철 마중 나와 준다며 따라 옴. 이 와중에 자기 엄마, 1번, 여행 때 만나 자기 욕한 사람들 험담만 주야장천 함.
8월 3일
- 2번은 1번이 싫어서 방을 나간다더니 여전히 나가지 않음.
- 2번이 여권을어떻게 찾았는지 이야기도 안 함. 아무리 봐도 돈을 뽑아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거짓말인 거 같음. 애초에 여권을 잃어버린 사람이 대사관 가지 않은 게 이상했음.
- 아침에 리셉션에서 날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10 유로만 빌려달라는 거였음. 방에 지갑을 두고 와서 없다고 하니까, 자기한테 돈을 빌려줘서 깜빡한 지갑을 챙기게 됐으니 고마워해야 한다고 함. 돈을 빌려주는 걸 전제로 이야기하길래 어이가 없어서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난 카드만 있으면 되니 괜찮다고 말하고 그대로 호스텔을 나섬. 좇아오면서 따라붙으려는 거 시간 부족하다고 냅다 뛰어서 도망감.
- 일정 마치고 숙소 돌아오니 자리에 '봉투가 뜯겨있는' 과자랑 햄버거를 선물이랍시고 줌.
- 침대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누군가 뒤진 흔적이 있음. 다행히 중요한 부분은 자물쇠로 잠가놓아서 분실한 것은 없음.
- 2번이 들어와서 수건 빌려달라고 함. 손 씻는 정도겠거니 싶어서 알겠다고 하니까 그대로 욕실로 들고 가서 샤워함. 내 마지막 남은 수건이었음. 덕분에 난 씻을 수건이 없어서 씻지 못 함.
- 씻고 나서 자기는 급하게 나가봐야 한다며 보조배터리랑 충전기를 나한테 두고 감. 자기 손이 젖어서 충전기를 못 쓴다고 대신 충전해 달라는데 이미 나는 소켓에 내 충전기를 꽂아 놓은 상태임. 딱 봐도 2층 침대에서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는 게 귀찮으니까 나한테 대충 던져놓고 나간 느낌.
8월 4일
- 내가 과자랑 햄버거 손도 대지 않은 걸 보고 독을 탄 것도 아닌데 왜 안 먹냐고 궁금한 듯이 물어봄. 그걸 말이라고 물어보냐고 이야기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싫은 내색 팍팍 내며 속이 안 좋아서 안 먹었다고 하자, 내 몸을 훑으며 '먹을 거 가릴 몸매는 아닌데'라고 말 함. 진짜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의아해하는 모습이 더 어이가 없음.
- 이미 잠자리에 누워서 등을 돌렸는데 계속 저기요 저기요 하며 깨우려고 해서 무시하고 눈 감고 안 듣는 척 함.
난 당신이 제일 무섭습니다 인간아...
8월 5일
- 아침에 눈을 뜨니까 상기의 카톡이 와 있음.
- 자기가 첫날 ATM 수수료에 알파를 얹어서 송금했는데(이것도 엄마가 해줌) 송금해준 만큼 유로를 더 달라고 함.
- 당연히 난 한 푼도 줄 수 없다, 오버분만큼 돌려주겠다고 하자, 그러면 자기는 공항으로 어떻게 가냐며 징징대고 짜증을 냄.
-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체크아웃하고 도망 나옴.
호스텔을 나와서 파리 북역까지는 한 시간 반은 걸어야 하는 거립니다. 이 사람이 더 따라붙는 걸 피하기 위해서 도망 나오느라고 지하철 역으로 가지도 못하고 빙 돌아서 긴 거리를 걸어갑니다. 걸어가는 시간 내내 어떻게 이 사람이 혼자서 여행을 나올 수 있었는지, 그리고 결국에 공항 가는 기차에 탈 수 있었는지 생각합니다.제가 당연히 돈을 줄 거라는 전제 아래 계획을 짠다는 게 세상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결국에 귀국행 비행기를 놓치면 좋겠다는 못된 상상을 해봅니다.
파리 역으로 가는 길은 선선해서 걷기에 좋습니다. 중간중간에 신호가 많지만, 인도가 전체적으로 포장이 잘 돼있고 정비가 잘 돼있어서 캐리어를 끌고 가기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아직 8월 초인데도, 높다란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 잎들 때문인지 길거리가 조금 황량하게 느껴집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도 적고 선선한 날씨가 황량함에 한몫 더하는 듯합니다.
황랑함과 선선함이 교차하는 파리의 아침
거니는 거리 곳곳에서 노숙자들이 눈에 많이 들어옵니다. 어떤 노숙자는 매트릭스에 담요에 몇몇 생활도구에 음악을 틀은 앰프까지 제법 본격적인 살림을 길거리에 차려놓은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 단위로 아이와 함께 노숙하는 사람도 보이고 애완견과 함께 노숙하는 사람은 보이는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을 할까 궁금해집니다. 직접 물어보는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제 담력이 아쉽게도 호기심을 따라오질 못합니다.
유로 스타를 타고 브뤼셀로 출발합니다
파리 북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이동하니 국경을 넘어 벨기에브뤼셀 남역에 도착합니다. 원래라면 브뤼셀 중앙역으로 가야 하는데 표를 잘못 예매하는 바람에 남역에서 내리고 맙니다. 다행히 그렇게 긴 거리는 아나라서 가볍게 걸어서 중앙역 쪽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겸사겸사 브뤼셀의 정경도 느껴보고요.
우리나라 세기말에서 볼 수 있었던 특유의 투박함이 돋보이는 브뤼셀 남역
브뤼셀 거리의 느낌은 파리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파리 역시 다른 지역보다 흑인과 아시아인 비중이 높다는 인상이었지만 브뤼셀에 비할 바는 아닌 듯합니다. 브뤼셀 남역 주위는 흑인과 이슬람인이 대다수로, 근처 식당 역시 흑인이 운영하는 이슬람 스타일의 레스토랑이많습니다.
콘테이너 박스 더미에 놓인 관람차가 주는 황량함이란
낯선 풍경에 쭈뼛대며 식당 입장을 망설입니다만 배가 고픈지라 눈감고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걱정했던 대로 가게 직원이 프랑스어인지 네덜란드어인지 모를 언어만 구사해서 메뉴판의 그림에 손짓 발짓을 해가며 음식을 주문합니다. 다행히 주문으로 나온 햄버거 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이 먹기에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겨우겨우 점심 주문에 성공!
브뤼셀 남역에서 중앙역까지 걸어오면서 펼쳐지는 거리의 풍경은인종의 스펙트럼을 타고 다채롭게 변화합니다. 남역 근처는 흑인, 이슬람 사람들이 주를 이루며 낙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낡은 스마트폰 판매점들이 보이는데, 무려 갤럭시 s6 광고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합니다. 파리 샹젤리제 앞에서 s10 광고를 본 게 며칠 전 일입니다.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이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서는 햇빛에 바랜 오래된 골목 문구점의 제품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빗바랜 헌책방과 무려 일본어 원서 망가들
도대체 언제적 스마트폰인지...
브뤼셀 남부에서 북으로 계속 걷다 보니 어느 순간을 경계로 잘 정비된 도로와 건물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백인비중이 늘어나고 주변에는 각종 편의시설들과 멀티플렉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중앙 광장과 공원이 잘 가다듬어져 잘 사는 사람들의 동네라는 느낌을 확 줍니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중앙 시장인 그랑플라스와 함께 시청사가 있는 도시 중심부에 도달합니다. 검은색과 금색이 조화되어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멋들어진 골목들이 들어옵니다.
벨기에의 국민만화 땡땡의 모험
널게 트인 공원과 멀티플렉스가 들어선 브뤼셀 중부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이 도로 통제 중입니딘
브뤼셀의 번화가 그랑플라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엔 브뤼셀 북부 쪽으로 걸어가면 중국어가 들리고 아시아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남에서 북으로 고작 한 시간 반 정도 걸어가며 다양한 인종과 조우하리라곤 생각도 못한 일입니다.
차이나타운에 온 것 같은 브뤼셀 북부
그랑플라스 근처의 호스텔에 도착한 저는, 잠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가 어느새 저녁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아무래도 파리에서 다양한 이유로 긴장했던 몸이 풀리면서 그대로 잠에 든 모양입니다. 브뤼셀에서의 체류 기간에 제법 여유가 있으므로 하루 정도는 푹 쉬기로 합니다. 근처 마트에서 컵라면을 사 와 간단하게 저녁을 때웁니다. 처음엔 신라면 정도를 찾으려고 아시아 마트에 갔다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UFO 라면을 발견하여 오늘 저녁으로 먹기로 합니다. 적당히 짭짤한 게 생각보다 맛있습니다. 배도 채웠겠다, 방에 이상한 사람도 없겠다, 넓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긴장할 필요가 없다니 오랜만에 평온을 맛보는 브뤼셀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