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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Nov 01. 2020

8월 8일, 67일 차, 런던

끔찍한 경험으로 시작하는 도시, 런던입니다

도미토리의 아침은 소리 없는 전쟁입니다. 아직 잠에 잠든 사람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소음을 내지 않고 짐을 정리해야만 합니다. 보통은 전날 밤에 다음 날 필요한 준비물들을 미리 캐리어에서 꺼내 놓아 아침에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만, 체크아웃으로 숙소를 떠나는 날에는 세면도구며 각종 옷가지 등을 캐리어에 정리해야 하므로 소리를 조금은 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다 보니 편하게 정리하기 위해 정리할 짐들을 복도로 가지고 나가기로 합니다. 각종 옷가지에 마무리해야 할 침구류까지, 복도에 쌓아 놓다 보니 좁은 복도를 혼자 점거하고 맙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계속 눈치를 주다 보니 허겁지겁 정리하고 호스텔에서 도망치듯이 나옵니다. 


이제 기차역으로 떠나려 하는데 무언가 허전한 걸 눈치챕니다. 평소 어깨를 짓누르던 가방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미 호스텔 정문은 닫혀서 잠겨버린 상황입니다. 체크아웃을 마쳤기에 저는 카드키도 없고, 호스텔 상주 직원도 없기에, 언제 열릴지 모를 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세가 돼버리고 맙니다. 만약 그 사이에 누가 가방에 손댄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급한 마음에 현관문을 계속 두들겼고 다행히 아침 청소를 하는 직원 분이 문을 열어줍니다. 다행히 짐이 무사한 것을 확인합니다. 크게 진땀을 흘리는 하루의 시작입니다.

가방을 호스텔 로비에 두고 문을 닫아버린 최악의 아침

기차 출발 한 시간 반을 남기고 브뤼셀 남역에 도착합니다. (이 짧은 체류 기간에 브뤼셀 북역, 중앙역, 남역을 모두 둘러봅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런던으로, 유로스타를 타고 해저 터널인 채널 터널을 넘어갈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국경을 넘어가는 기차인 데다가 영국이 EU 국가 중에서도 출입심사가 까다로운 이유로, 아침부터 서둘러 출발한 겁니다. 다행인 것은 약 두 달 전에 한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 대해 여권 자동심사가 도입되어서, 여권을 기계에 스캔하고 출신, 방문 목적과 기간 정도만 물어보고 바로 통과합니다. 옆 심사대에서 입국을 위해 각종 서류를 구비하고 심사를 받는 것을 보면서 새삼 대한민국 여권의 위력을 실감하게 됩니다.

유로스타를 타기 위한 출입국 심사대. 흡사 공항을 온 기분입니다
한국 여권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
런던으로 떠나봅니다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으로 넘어가는 기차는 심심하기만 합니다. 약 두 시간 정도를 타고 가는 기차는 너비가 너무 좁아서 옆 사람하고 계속 어깨가 살짝씩 닿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와이파이는 제공한다고 하는 데 거의 안 되는 수준이고, 해저터널이라고 혹시나 바닷속을 구경할 수 있나 기대했지만 창밖은 어두컴컴할 뿐입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한 속을 달래며 런던에 도착할 시간만을 기다립니다. 한참을 기다려 도착 안내음이 들리기에 시간을 보니, 예상 시간인 두 시간이 아닌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아 잠시 의아해합니다만, 이내 시차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60일이 넘는 유럽 여행길에 시간대가 바뀌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세인트 판크라스 역 도착!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서 내리니 정말로 런던에 온 기분입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붉은색 2층 버스와 시계탑이 거리에 펼쳐져 있습니다. 정말 전형적으로 다가오는 런던의 모습을 좀 더 만끽하고자 숙소까지 한 시간 정도의 거리를 걸어보기로 합니다.

드디어 런던입니다

차선이 뒤바뀐 도로, 연속되는 마천루, 공사 때문에 통제된 도로들, 이제는 완전히 친숙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도시 분위기를 즐기던 저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아까 먹은 버거킹이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배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아직 숙소까지 3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데 당장이라도 배가 폭발할 것 같습니다. 10분마다 찾아오는 끔찍한 고통에 걷는 순간순간이 지옥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어떻게든 공중화장실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대중교통이라도 찾아봅니다만 어떻게 찾아봐도 방법이 없어 숙소까지 서둘러갑니다. 간신히 숙소가 코앞에 보입니다만, 마음을 놓은 그 순간, 결국 일이 터져버리고 맙니다. 

너무나 전형적인 런던의 모습

불쾌한 기분을 참으며 겨우 체크인을 마치고 뒤처리를 합니다. 세상에 상상도 못 한 일을 경험하며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도대체 배가 어떻게 된 것인지, 뱃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복통에 온 몸이 몸서리를 칩니다. 평소 신경성 장염을 앓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배가 아픈 경험은 처음입니다. 비상약으로 챙겨 온 지사제를 꺼내 먹고는, 근처 가게에서 부담이 적은 과일과 주스로 저녁을 때우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휴식을 취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범인이었을까 지금까지 먹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다가 잠이 든, 악몽같은 런던의 하루입니다.

숙소가 코앞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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