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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Feb 08. 2021

8월 12일, 71일 차, 런던

폭우의 뮤지컬의 도시, 런던입니다

뻑적지근한 몸을 비틀며, 아침잠에서 깨어납니다. 전날 밤 F워드를 남발하던 친구들이 마음에 걸려서, 중요한 짐들을 숙소에 두지 않고 가방에 챙겨서 들고 다녔더니 근육통이 온 모양입니다. 노트북에 이것저것 다 합치면 벌써 5kg에 가까운 무게니 몸이 비명을 지를만합니다.


여행의 끝이 다가온다고 8월 들어서 막판 스퍼트를 내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냥 기숙사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지만, 같은 숙소에 양아치 같은 친구들이 계속 소리를 지르며 대화를 하고 있어서 너무나도 불편합니다. 별 수 없이 노트북만 챙기고 도망치듯이 숙소를 빠져나옵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뛰쳐나온 런던의 날씨는 쌀쌀하게 다가옵니다. 아직 여름인 한참인 8월인데도 전날 밤에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인지 살짝 움츠려 듭니다. 급하게 나온다고 반팔만 입고 나온 것이 조금 후회됩니다. 이제라도 숙소로 돌아가서 긴 팔을 꺼내올까 싶다가도, 꽤 늦은 아침까지 방을 점거하고 있는 양아치들과 마주할 것을 생각하니 그냥 추운 날씨를 참는 것이 낫겠단 생각이 듭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 금세 점심시간이 가까워집니다. 그간 받은 스트레스도 풀 겸 오늘 점심은 마음껏 사치를 부려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런던에서 사치를 부리며 먹을 수 있는 점심이 무엇이 있을까 찾아봅니다만 막상 떠오르는 음식이 없습니다. 겨우겨우 영국남자에서 봤던 '런던에 갔을 때 가봐야 할 햄버거집 추천 리스트'가 떠오릅니다. 티어별로 정리된 리스트 중에서 가장 가까운 집을 찾아보니 어니스트 버거입니다. 살짝 내리는 비도 피할 겸 서둘러 달려가 봅니다.

런던의 맛집 어니스트 버거

버거집은 뒤숭숭하면서도 친근감이 드는 것이 와일드한 분위기가 듭니다. 대표 메뉴를 시키자 다음과 같은 메뉴가 나옵니다. 매운맛이 감미되어 미디엄으로 구워진 감질나는 소고기 패티가 들어간 수제 버거, 훈향과 함께 삶은 감자의 식감이 느껴지는 허브 솔티 감자칩, 너무 시지 않고 적당히 달고 허브 향이 잘 어우러진 레모네이드까지. 완벽한 수제 버거 세트입니다.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몇몇 수제 버거집을 다녀봤지만 어니스트 버거와 비교할 곳이 없습니다. 14.5파운드로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에 매우 만족스러운 식사입니다. 

세상에서 먹어본 제일 맛있는 버거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엔 시티 오브 런던을 거닐어 봅니다. 여기가 바로 휘황찬란한 런던의 중심지입니다. 즐비한 마천루들은 단순히 높기만 한 빌딩 숲이 아닙니다. 건축가들의 실험장인 마냥 다양한 형태의 빌딩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30 세인트 메리 엑스는 솔방울처럼 생긴 독특한 외형을 하고 있는데, 주변에 다른 마천루들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는 풍경에서 유달리 돋보입니다. 어떤 빌딩은 로켓 발사대처럼 생겨서 실제로 발사대 부분에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왕복하는 모습도 보이고, 건물 내부로 전차가 통째로 드나드는 빌딩도 보입니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템즈 강 건너로 보이는 유리로 만든 사우론의 탑, 더 샤드입니다. 

거울처럼 빛나고 있는 30 세인트 메리 엑스
시티 오브 런던은 마천루의 실험장입니다

마천루의 숲을 거닐며 런던의 중심에서 도시를 살펴볼만한 전망대를 찾아보다가 도심 한가운데 세워진 작은 기념비를 발견합니다. 가까이서 보니 런던 대화재 기념비라고 적혀있습니다. 17세기에 런던이 잿더미가 되었던 대화재를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비로, 정보를 찾아보니 런던이 거의 다 타버릴 정도로 엄청난 화재였다고 합니다. 기념비 입구에선 타워 안내원과 우산꽂이가 보입니다. 저는 우산을 꽂아두고 빙글빙글 계단을 타고 기념비 꼭대기에 도착합니다. 비가 계속 내려서 우중충한 하늘과 시야를 가득 메운 마천루들의 모습은 회색도시 그 자체입니다.

런던 대화재 기념비
런던 대화재 기념비에서 바라본 런던의 풍경

대화재 기념비에 올라 런던을 둘러보며 오늘의 목적지를 눈에 새겨 넣고 다시 여정을 떠납니다. 마천루 한가운데 뜬금없이 나타나는 크리스마스 느낌의 리든홀 마켓, 템즈 강을 건너기 딱 좋은 런던 브리지, 런던 브리지 병원과 가까이서 보는 더 샤드, 런던 브리지 스테이션, 랜드마크를 돌며 천천히 시내 구경을 해봅니다. 그리고 런던 시청을 건너 런던의 또 하나의 랜드마크인 타워 브리지에 도착합니다. 마치 페인트로 갓 칠한 장난감처럼, 다리 가운데 세워져 있는 두 개의 타워와 이들을 잇는 하늘색의 철제 구조물이 인상적입니다.

리든홀 마켓
런던 브리지 병원
런던 브리지 스테이션과 더 샤드
타워 브리지
타워 브리지에서 한 컷

타워 브리지를 다 건너갈 때쯤, 하루 종일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폭우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전부 비를 피하기 위해 다리 밑으로 모여듭니다. 거센 비를 피해 거리가 텅 비어버리자, 쏟아져 내린 비로 거울처럼 매끈해진 바닥에 타워 브리지가 비치는 것이 보입니다. 혼란한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발견한 보기 드문 찰나의 순간입니다.

폭우 속에 비친 런던 브리지

타워 브리지를 떠나 계속 나아갑니다만, 거센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런던의 도로는 상태가 좋질 않아 군데군데 파인 웅덩이를 자꾸만 밟아 신발에 양말까지 자꾸만 흠뻑 젖어버립니다. 차도마저도 상태가 별로인지 버스나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거대한 파도가 만들어져 피할 새도 없이 바지가 다 젖어버립니다. 가능하면 어디 틀어박혀서 쉬고 싶습니다만 주변에 아무것도 없기에, 찝찝한 느낌을 참아가며 계속 길을 나아갑니다. 비가 오는 것을 꾹 참고 마지막 목적지였던 런던 타워 입구까지 도착해봅니다만, 무려 30파운드가 넘는 입장료를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의욕이 다 꺾여버려서는 오늘은 다른 명소를 더 돌아다닐 여력이 사라집니다.

정말 비가 그치지도 않고 내립니다
너무나도 비쌌던 런던 타워의 입장료

갖은 고생 속에서 거리를 거닐었기에 저녁은 마음 내키는 대로 먹어보기로 합니다. 거리를 거닐어보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런던에 한국 음식점이 제법 많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듣기로는 근 2~3년 사이에 한국 음식이 런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구글을 켜서 이곳저곳 찾아보니 가장 평점이 좋은 'onthebob'이라는 체인점에 가보기로 합니다. 두 달 넘게 유럽을 돌면서 너무 먹고 싶었던 한식이 바로 양념치킨인데, 오늘 그 한을 풀어보기로 합니다. 가게에 앉아 매콤 달콤한 맛의 양념치킨을 시키니, 불그스름한 양념이 잘 발라진 치킨에 한국식 샐러드가 같이 나옵니다. 여기에 콜라까지 얹어 먹으니 완전히 한국에서 먹던 치콜의 맛 그 자체입니다. 유럽에서 다양한 형태의 치킨 요리를 먹어봤지만 역시 양념치킨에 비할 것은 없습니다. 양념이 조금 달짝지근해 먹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더부룩해지긴 하지만 샐러드와 콜라가 이를 커버해줘서 즐겁게 식사를 합니다. 한화로 3만 원 가까운 돈이 나간 게 조금 아쉬울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줄지어서 기다리던 한국 길거리 음식점 'ONTHEBOB'
너무 맛있었던 Yangyum Chicken

저녁 식사 후, 웨스트엔드 거리를 둘러봅니다. 영국 뮤지컬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웨스트엔드입니다. 런던에 오면 꼭 뮤지컬 하나는 보라고 추천이 많아서 저도 미리 예매한 표가 있습니다. 바로 스쿨 오브 락입니다. 위키드, 라이언 킹처럼 유명한 스테디셀러들도 많습니다만, 어렸을 때 너무 재미있게 본 잭 블랙의 스쿨 오브 락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온 뮤지컬 전용 극장은 생각보다 더 무대가 가깝게 느껴집니다. 공연은 세 시간 내내 쉼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데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 웃겨서 지루할 틈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목은 '스쿨 오브 락'답게 삽입곡 대부분이 락스타일이다 보니 듣는 귀가 즐겁고 흥겨움이 가시질 않습니다. 특히 극 중에 아이들이 음악에 맞추어 열정적으로 방방 뛰어다는 데, 박자에 맞추어 뜀박질을 할 때마다 진동 때문에 제 심장도 같이 뛰는 것 같아 너무 좋습니다.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공연은 극 중 학부모들이 실제로 관객석에서 관람을 하는데, 어느새 저를 포함한 관객들도 실제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극 중 학부모들과 함께 스쿨 오브 락을 외치며 앙코르를 외치고 있습니다. 꼭 영화 속의 한 장면에 들어간 것만 같습니다. 마지막 커튼콜까지 멋진 공연으로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머릿속에 공연 장면이 떠나가질 않습니다. 이미 한 밤이 되어서 컴컴해진 런던의 밤길을 걸어오며 가시지 않는 여운을 곱씹는 최고로 흥이 난 런던의 하루입니다.

스쿨 오브 락 전용 극장
환호가 끊이지 않는 무대의 열기
오늘의 공연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
반갑다 숙소여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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