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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Aug 23. 2018

더블린과의 작별을 고하며

#32. 뜨겁게 뜨겁게 안녕, 아일랜드


 장장 1년 6개월의 표류기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더블린과의 이별 첫 단계는 나의 유학생활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몸담았던 SuperValu에 ‘Resign paper’를 제출하는 것. 별다른 양식도 없이 맨 종이에 ‘나 송유영은 2018년 7월 4일 부로 SuperValu를 그만둡니다.’ 달랑 한 줄 쓴 것이 전부였지요. 들어올 땐 갖은 질문에 답변을 보태고 보태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렸는데, 나가는 일은 기본적인 ‘Why’라는 질문조차 필요가 없어집니다. 다음날부터는 마주치는 동료들마다 “그만둔다며?”하며 말을 걸어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던 속담은 아일랜드에서도 통용되는 것인가 봅니다. “왜 돌아가는 거야?” “공부가 끝났으니까”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제 아일랜드에 머물 수 있는 비자가 없다고” “그럼 나랑 결혼할래?” 언젠가는 그리워질 그들의 싱거운 농담들. 마지막 근무 날, 한국 과자들을 하나씩 나누어주며 고마웠다고 인사를 전했습니다.     


 포옹과 함께 덕담으로 인사를 나누던 중,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이 제 손에 선물 한 더미를 얹어주며 이런 말을 합니다. “Song. First of all, 우리는 네가 이 곳에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디서든 행운이 가득하길 빌어. 잘 지내. 그리고 네가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우린 언제나 환영이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도 이런 말들은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이렇게 온갖 예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연고도 없는 아일랜드라는 타지에서 정말이지 좋은 동료들을 만나 괜찮았던 기억들만 한 아름 안고 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름대로 제 인생에서 손꼽히는 크나큰 도전이었던 SuperValu를 나서는 발걸음은 'Resign paper'와는 반대로 무겁기만 합니다.    

 

@ SuperValu 동료들에게 받은 굿바이 선물


 근래 2주간은 중고물품을 파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더블린에 와서 한창 한국인 유학생 중고장터에서 괜찮은 물품들을 사들이는 데 재미를 붙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팔아야 하는 입장이 되는 날도 결국 오는군요. 더블린까지 가져왔던 스케이트보드, 더블린에서 구매한 기타, 전기장판, 빨래 건조대. 한국에 가져가기에는 ‘짐’만 되는(마음 같아선 가져가고 싶지만 자리가 없는 것들) 옷가지들이나 책들. 입양시키는 마음으로 새 주인을 찾은 물건들의 행복을 빌어주고는 결국 팔리지 않은 물품들, 즉,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보내야 하는 물건이나 버려야 하는 물건이나. 결국 ‘짐’을 최대한 덜고 가기 위해 이 곳 더블린에서 작별해야 하는 것들. 나의 손때만큼이나 어느 가느다란 기억의 가락이라든지, 이야기가 깃들어있을 터인데 그것들이 덜어야 할 ‘짐’이 된다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더블린에서 작게든 크게든 정을 주고받았던 이들이 또 딱 그만큼의 아쉬움을 표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귀국 날짜 바로 당일에 회포를 풀자는 매정하고도 다정하여 탓할 수 없는 친구 녀석들, 뭐가 가장 먹고 싶냐며 준비해놓겠다는 나의 가족. 지난해 2월에 한국을 떠나 더블린 땅을 밟을 때에는 혈혈단신 혼자였는데. 이제는 더블린에도, 한국에도 품이 생겼습니다. 익숙해진 땅에서 발걸음을 떼는 일은 늘 천근만근입니다. 한국에서 더블린으로 올 때는 가져갈 것이 너무 많아 탈이었는데.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뭐가 됐든 한국에서 다시 사면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짐을 버리고 또 버리게 됩니다. 더블린에서 생활하며 눈덩이처럼 불어난 살림을 다 해치우고, 조금은 낯설어졌을 고향으로 갈 가방에 ‘부담감’을 대신 욱여넣습니다.      


 더블린을 떠나기 전에 더블린 여행을 해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 좋던 날씨가 내내 흐리고 비가 옵니다. 이제 썸머타임도 끝물인가 봅니다. 생각해보니 더블린은 원래 그런 곳이었지 싶습니다. 늘상 우중충하고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가 아주 가느다랗게 내리는 곳. 한국은 지금 30도를 웃돌며 무더위에 난리라는데. 갑작스레 바뀌는 온도를, 시차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다시 적응하고 돌아가기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더블린에서의 마지막 글을 쓰는 이 순간, 거의 다 완성된 캐리어 가방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기도 전에 시야에 들어오는 텅 빈 방의 하얀 콘크리트 벽이 마음에 가까이 달라붙어 저를 온통 시리게 만듭니다. 


안녕, 더블린. 1년 6개월 동안 별 일이 다 있었다만, 공항에서 흘리는 아쉬움의 눈물은 별개로, 해피엔딩으로 나의 인생의 한 막을 닫는구나. 고마웠어. 부디 늦지 않은 미래에 다시 올 수 있기를 바라며. 2017년 2월 23일부터 2018년 8월 23일까지의 아일랜드 체류를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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