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는 끝났는데
비행기 위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인천에서의 출발이 한 시간 지연됐고, 자연스레 도착 시간도 그만큼 늦어졌다. 2시간이었던 경유 시간도 1시간으로 줄어 버렸다. 혹시나 다음 비행기를 놓칠까 봐 내리기 전부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경유지인 디트로이트에 오기까지 장장 13시간이 걸렸는데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 전날도, 그 전전날도 꼴딱 밤을 새운 데다 다급한 상황에 놓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야 했는데 ‘몬트리올’이라는 글자를 찾으며 직원에게 내 짐이 없다고 했다. 직원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네 짐은 ‘인천’에서 오지 않았겠느냐고 전광판을 가리켰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짐을 찾아 다시 부치고 게이트까지 한 달음에 뛰어갔다. 코로나 음성 확인서 검사, 열 체크. 복잡한 관문을 통과하고 드디어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여행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입출국이 가능한 시기. 나의 경우에는 'Family Reunion'이라는 명목이 있었고 그건 나 자신에게도 상당히 생소한 이유였다. 입국 심사도 까다로울 거라고 생각하여 서류를 10장도 넘게 준비해 갔는데 경유지인 미국보다도 간단히 끝나 버렸다. 뭘 보여 줄라 치면 ‘아니, 괜찮아. 내 컴퓨터에 정보 다 있어.’ 하더니 1분도 지나지 않아 나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6개월짜리 관광비자를 찍어 주었다. 짐을 찾고 게이트로 나갔다. 아흐준이 서 있었다. 살이 쏙 빠져 움푹 파인 눈을 하고는. 바로 택시를 잡아 타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우리집’으로 향했다. 아흐준과 택시 기사가 불어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창밖의 몬트리올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는데 거리마다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30분도 안 되어 집에 도착했다. 캐리어 두 개와 함께 짐짝처럼 서 있다가 길가에 늘어선 집들을 감상했다. 건물마다 바깥에 계단이 용수철처럼 말려 있었다. 더블린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집안은 휑뎅그렁했다. 아흐준의 눈썰미를 믿지 못해 내가 가기 전까지 아무것도 사지 말라고 하긴 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사지 않은 아흐준이 고맙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그렇게 14일의 자가격리가 시작됐다. 어플로 매일 증상 유무를 체크해야 했고, 가끔 확인 전화가 오면 받아야 했다. 일주일은 시차에 나를 길들이느라 낮잠을 많이 잤다. 새벽에 눈을 뜨면 가족들이 떠올라 몰래 울었는데 아흐준이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 나를 달래 주면 더 크게 울었다. 자가격리하는 동안 일상은 단순했다. 만들고 치우고, 아흐준과 놀고, 가끔 공부하고, 만들고 치우고 자고. 그러는 동안 14일이 금방 지나갔다. 그런데 자가격리가 끝나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락다운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기도 했고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에 나가기가 꺼려졌다. 몬트리올에서만 확진자 수가 하루 500명을 웃돈다. 이상하게도 갑갑함이라는 게 없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시간은 잘 가고 마음은 평온하다.
시계를 볼 때마다 내가 본 시간에 두 시간을 더해 본다. 그리고 낮과 밤을 바꾸면 한국 시간이 된다. 요즘은 오전과 오후에 공부를 하고 해가 질 때쯤 글을 쓴다. 일주일에 두 번씩 엄마와 영상통화를 한다. 전화를 끊고 나면 엄마는 집에 있구나, 실감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몬트리올에 있다고 할 수 있나. 집에 있다고 할 수 있나. 아직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것 같다. 인천에 더 가까운지 몬트리올에 더 가까운지 알 수 없는 공중 한복판에서 다리를 문 밖으로 내놓고 잠이 덜 깬 채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착지하고 싶어 질 때가 곧 올 거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그냥 마음껏 모를 계획. 가끔 시간을 역행할 계획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