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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 Sep 13. 2021

도둑맞은 시간

유연함은 사실 단단함에서부터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의도적으로 템포를 조금 빠르게 혹은 조금 느리게 연주


피아노를 치다말고 악보에 쓰인 rubato(루바토)를 구글에 검색하니 나오는 문장이다.

'조금 빠르게 혹은 조금 느리게?'

보통은 점점 세게의 반대에는 점점 여리게가 있고, 점점 빠르게의 반대에는 점점 느리게라는 상반되는 음악 용어들이 각각 존재한다. 그런데 이 혼종은 뭐람? 빠르게와 느리게가 어떻게 함께 공존하고 있는거지?



쇼팽 녹턴 2번(op.9 No.2) 악보에 쓰여있는 rubato



잠시 피아노 얘기를 하자면 -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부터 시작해서 꽤 오랫동안 피아노 학원을 다니다가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집에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어서 뜨문뜨문 기억을 살려 뚱땅거려보곤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사회초년생이 되었고, 혼란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당시 다니던 회사와 5분 거리에 있는 성인 취미 피아노 학원을 발견하곤 뭔가에 홀린듯 등록까지 해버렸다.

그렇게 나의 피아노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울 땐 몰랐는데 음표를 따라 그냥 건반만 두드리면 될게 아니었다. 소설을 읽듯, 악보도 하나의 작품이기에 잘 읽어야 한다. 음표는 책으로 치면 글자일뿐이다. 한글을 읽을 줄 안다고 해서 모든 책을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듯, 피아노도 마찬가지였다.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등장인물은 어떤 말투로  대사를 했을 , 맥락을 파악해야 소설의 내용을 제대로 음미할  있다. 악보에서는 동글동글 콩나물 같은 음표들 틈에 위치한 각종 글자와 기호들이  맥락을 담당한다. 박자나 세기를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노래하듯이, 속삭이듯이, 격정적으로, ... 같은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표현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루바토로 돌아와서

명확하게 의미와 가이드가 있는 다른 용어들과 다르게 루바토는 양면성을 지닌다. 설명 그대로 빠르든 느리든 연주자가 원하는 템포대로 연주하면 된다. 그 표현의 자유를 주는 구간에서 연주자들의 개성과 스타일이 드러난다.


같은 음표와 박자인데 어떤 연주자는 굉장히 격정적으로 강조하고, 어떤 연주자는 스무스하게 넘어간다. 속도를 빠르게 했다가 마지막에 확 느리게 해서 반전을 주는 흐름으로 연주할 수도 있고, 반대로 서서히 자연스럽게 느려지도록 표현할 수도 있다.

그래서 클래식 피아노는 하나의 곡을 연주자 별로 어떤 스타일로 치는지 들어보는 재미가 있다.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듣다보면 내 귀에 잘 익고 흐름이 와닿는 스타일이 분명히 존재한다.



도둑맞은 시간

@Unsplash
Rubato;
1. 풀네임은 tempo rubato (*tempo : 박자, 속도)
2. rubato는 '훔치다'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rubare에서 유래


유래에 따르면 rubato '도둑맞은 시간' 의미한다.

박자의 유연성을 두고 시간을 도둑 맞았다니, 이런 낭만적인 표현이 또 있을까. 실제로 루바토 구간을 느리게 연주한다면 그 앞이나 뒤에서 일부러 박자를 약간 빠르게 치는 패턴이 자주 보인다. 반대로 루바토 구간에서 빨라졌다면 마무리할 때 여유롭게 연주하는 패턴도 있다. 이름 그대로 앞뒤 구간에서의 박자를 당겨와 훔쳐쓰는 격이다.


능수능란한 피아니스트에게는 자유롭게 표현할 기회(?)일지 모르겠으나, 아마추어 취미생인 나는 이 루바토 구간을 표현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딱 정해주면 확신있게 칠텐데, 내 마음이 이끄는대로 치라니. 아직까지 그 자유를 누리는 것이 잘 안된다.


이런 걸 보면 유연함은 사실 단단함에 기반해서 나오는 것 같다.

  차이로 촌스러움과 세련됨을 오간다고 하는데 그걸 구분해낼  있는 귀와, 원하는 대로 굴릴  있는 탄탄한 손가락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가는 방향이 맞다는 확신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필요한  같다. 피아노도, 다른  어떤것도.


회사를 다니면서 피아노에 위로를 많이 받았던 건, 연습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사실은 일상에도 많이 적용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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