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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Drawing Hand May 14. 2021

013 마음의 추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우리 모두 소파로 자리를 옮긴다. 각자 지정석에 앉아서 TV를 켰다. 그렇게 20~30분 정도 뉴스를 남편과 Ama*(시어머니를 바스크어로 엄마 Ama라고 부르고 있다.)와 함께 시청한다. 물론 나는 영상 위주로만 본다. 스페인어로 흘러나오는 음성도 자막도 내게 여전히 조각난 퍼즐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젠 자료화면으로 보이는 바스크 지역들이 많이 익숙해졌다. 우리가 사는 비토리아나 남편의 고향 자라우츠가 나오면 아주 빨리 알아채고 반갑기도 하다. 뉴스가 어느 정도 끝나면 넷플릭스를 볼 차례다. 우리 세 사람은 일주일 전부터 스페인 드라마 시리즈 <El inocente>를 보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제목은 영어와 큰 차이가 없다. 스페인어가 이렇게만 쉬우면 누구나 금세 스페인어가 늘 텐데. 갑자기 눈물이 난다. 넷플릭스의 무궁한 볼거리 중에서 일부러 스페인 드라마를 선택했다. Ama가 보시기에도 스페인어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테고 난 자막으로 보면 된다. 남편과 둘이서 넷플릭스를 볼 때도 한 사람은 자막을 봐야 한다. 혹은 둘 다 모두 자막을 봐야 하거나. 가끔 스페인 드라마나 영화 중에서 보고 싶어도 영어 자막이 없어서 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La casa del papel : 종이의 집>.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시청했고 한국에서도 꽤 반응이 좋았던 것 같은데, 정작 스페인에 있는 나는 영어 자막이 없어서 볼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자막이 추가되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El inocente>는 사소한 시비로 싸움에 휘말리고 결국 의도치 않은 살인을 해버린 남자가 주인공이다. 패싸움, 살인, 재판, 복역, 출소, 가족의 죽음, 결혼, 임신이 첫 번째 에피소드 1시간 만에 다 일어났다. 에피소드가 끝나자 머리가 멍해졌다. 우리가 지금 뭘 본거지. 스포를 좀 하자면 이 드라마에는 남자 주인공만큼이나 스펙터클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나온다.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면서 나는 전혀 다른 스토리를 보여주는 옴니버스 형식인 줄 알았다. 관계없어 보이던 등장인물과 이야기가 결국 다 연관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난 주변 인물을 무게 있게 다뤄주는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드라마는 합격점이다. 문제는 잔인한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와서 도무지 화면을 볼 수가 없다. 화면을 볼 수 없으면 자막을 읽은 재간이 없다. 결국 나는 대사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상하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일주일째 보고 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삶은 당연히 만들어진 이야기, 허구다. 세상에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제발 믿고 싶다. 그래야 그나마 마음 편히 다음 에피소드를 볼 수 있다. 드라마 속 그들의 삶과 소파에서 앉아 그 삶을 보는 내 삶 사이에는 닮은 구석이란 전혀 없다. 남자 주인공이 첫 에피소드 한 시간 동안 겪은 일 중에서 나는 '결혼'만 경험했다. 평범한 삶 속에도 갈등과 사건 사고가 있지만 그렇게 극적이진 않다. 내 삶은 느리고 지루하지만 안전하다. 외부 자극에 의해서 소용돌이치는 인생을 살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 선택이 중요한 삶이다. 그래서 매번 선택할 때마다 조심스럽다.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는다. 나 자신에게 세심해져야 한다. 내 인생에서는 아무리 무섭고 불안해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마음속에 있는 중심 추가 이번에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 모든 감각을 최대한 집중해본다. 드물게 마음의 추가 확실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선택이 쉬울 때도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대게 추가 양 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내 선택의 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결과가 뚜렷하게 보이는 일이라면 미리 피하거나 대처라도 할 텐데... 진짜 삶에서 내리는 선택은 그 어떤 결말도 금세 보여주는 일이 없다. 다만 비슷하게 애매한 선택을 해야 하는 일들이 계속 이어질 뿐이다. 지금 이 글을 언제 어떻게 끝낼지 선택해야 하는데... 내 마음의 추가... 오늘은 이렇게 끝내기로 한다.  


Dear me by The Drawing Hand, 2015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인스타그램 : http://instagram.com/thedrawinghand.viva

그라폴리오 : https://grafolio.naver.com/jieunkim

유튜브 : http://youtube.com/thedrawing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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