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Drawing Hand May 20. 2021

019 어쨌든 그리는 사람

그리는 시간을 챙기다는 건

며칠 전 지인과의 대화 중 했던 고백처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한 2012년 이후로 그 선택을 후회한 적 없다. 그림은 그렇게 힘들어도 꾸준히 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아무리 좋아하던 일도 일이 되면 괴로운 순간이 온다. 그런 순간을 피할 도리는 없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그리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챙기기로 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찾은 그리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 2015년부터 지난 6년간 '함께하는 드로잉'이란 이름 아래 크고 작은 모임을 진행했다. 4주 워크숍, 원데이 클래스, 3일 워크숍, 매달 한 번 동네 모임, 반나절 여행, 그리고 1박 2일 제주 드로잉 여행까지. 모이는 사람도 매번 다르고 시간과 장소는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언제나 깨닫는 진리는 같다.


'혼자 하는 드로잉도 좋지만 함께하는 드로잉은 더 좋다.'


스페인에 온 뒤로 한국에서 진행하던 모든 '함께하는 드로잉'은 자연스럽게 멈췄다. 그중에서도 3년이나 함께 그렸던 동네 모임은 내가 없이도 잘 유지되고는 있지만 코로나로 인해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내게는 여전히 함께 하는 드로잉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기획하고 사람을 모아 시작한 '함께하는 드로잉, 온라임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ZOOM을 통해서 모여서 2시간 정도 그림을 그린다. 7시간 시차가 있어서 스페인에서는 낮 1시, 한국에서는 오후 8시에 총 9명이 모여서 그림을 그린다. 작년 12월부터 시작했고 어제는 그 여섯 번째 모임이 있었다.


모임의 다른 분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모임을 시작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설레고 긴장한다. 이건 한국에서부터 계속 그랬다. 특별한 목적 없이 오롯이 나를 위해 그리는 시간을 챙기는 것은 정말 중요하지만 바쁜 일상에서는 참 어렵다는 걸 안다. 멤버들에게는 늦게라도 꼭 오시라 했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일찍 시작하고 싶다. 귀하게 얻은 낙서하는 시간을 최대한 오래 즐기고 싶은 욕심이다. 어제는 9명의 멤버 중 5명이 모였다. 한국은 석가탄신일로 휴일이기도 했지만 학업, 일, 가족 등 일상을 챙기다 보면 한 달에 두 시간을 오이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다는 걸 안다. 안부 인사와 함께 오늘 어떤 그림을 그릴 건지 서로 이야기 나눈다.

"요즘 그림을 자주 못 그려서요."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그리는 시간."

"지난 모임 이후로 그림을 통 그렸어요."

언제나 모두 함께 갖고 있는 아쉬움. 그래서 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고 소중한가 새삼 느낀다.


오늘은 참 드로잉북이 낯설다. 마지막에 그린 이 그림, 이걸 언제 그렸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찔하다. 벌써 3주 넘게 이 드로잉북을 펼친 적이 없다. 당황하니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2 주 전에 산 새로운 물붓을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포장도 벗기지 않고 그대로라니. 수채 물감 팔레트를 열어 손이 가는 대로 색을 선택해서 붓에 적시고 종이 위에 그려본다. 가격이 저렴해 큰 기대가 없었는데 괜찮군. 색을 바꿔가면서 튜브에 담긴 물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지와 붓끝은 잘 모아지는지 등을 살폈다. 새 붓 테스트로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 흔적은 내가 자주 보는 창 밖 나무로 변했다. 무엇을 그릴지 몰라도 일단 그리기 시작하면 무엇인가 보인다. 나무들을 계속 그려보자. 매일 보는 나무를 떠올리며 보이는 대로가 아닌 기억나는 대로 그렸다. 더 이상 창 밖의 나무가 아니라 이젠 내 기억에만 있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느 숲이다. 나무 사이로 작지도 크지도 않은 원을 하나 더 했다. 짧은 선으로 더하니 나무 사이로 공기가 흐른다. 나무 뒤로 어두운 배경색을 더하니 갑자기 밤이 되었다. 오랜만에 금색 잉크병을 흔들어 가라앉아 있던 금색 가루를 깨웠다. 세필붓을 꺼내 금빛을 밤하늘과 숲에 더했다. 아까 그린 원은 이제 달이 되어 빛난다. 완벽한 검정은 없는 자연 속에 진한 검은색으로 긴 머리카락을 날리는 한 사람을 그려 넣었다. 모두가 잠든 밤에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을까? 이 사람은 황금빛이 감도는 달을 바라보고 서 있지만 곧 어디론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파스텔과 색연필을 꺼내 물감과 금색 잉크가 표현하기 힘들었던 거친 바람을 더해줬다. 이 사람은 부드러운 바람이 거칠게 변해도 묵묵히 원하는 길을 걸어갈 사람이 되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거칠게 변해도 묵묵히 원하는 길을 걸어갈 사람
함께 하는 드로잉 - 온라인 2021년 5월 모임에서 그린 생각의 흔적 by The Drawing Hand

여기까지 그리고 나니 더 이상 그릴 힘이 없다. 드로잉북이 작아 다행이다. 오랜만에 그리면서 생각을 했더니 피곤하고 지쳤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그리면서 생각하는 시간이 좋아서, 오래동안 그렇게 그리며 살고 싶어서 그리는 삶을 선택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무리 강렬한 기억도 오래되면 잊히기 마련. 더 자주 그리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챙겨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쨌든 그리는 사람.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인스타그램 : http://instagram.com/thedrawinghand.viva

그라폴리오 : https://grafolio.naver.com/jieunkim

유튜브 : http://youtube.com/thedrawinghand  

매거진의 이전글 018 여전히, 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