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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Drawing Hand May 19. 2021

018 여전히, 봄

봄을 길게 사는 사람

영국에서 살 때는 하루에 한 번 이상 누군가와 날씨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학원 선생님도 수업 인사부터 날씨를 언급하거나 홈스테이 호스트 가족과 대화를 할 때도 오늘 혹은 요즘 날씨가 화두인 경우가 많았다. 하루에도 여러 번 변덕스럽게 바뀌는 영국 날씨는 일상에서 중요한 관심사라는 걸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친구나 일로 만난 사람에게도 인사말에 이어 '오늘 날씨 너무 좋지?' 혹은 '아침에 비가 와서 그런지 지금도 춥다.'라며 어느새 날씨로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가는 나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영국 사람들의 특성인 줄 알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존재하고 동시에 하루에도 날씨 변화가 잦은 곳에 살면 생기는 현상인 것 같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나는 언제나 변함이 없지만 확실한 변화를 보여주는 계절과 날씨니까 아무래도 관심을 더 갖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스페인 남쪽은 날씨가 온화하고 일 년 내내 기온차가 크지 않지만 내가 사는 북부는 사계절이 뚜렷한 편이다. 또 여름을 제외하고는 비가 자주 온다. 아니,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라던데 비가 내리는 날이 많다니? 누군가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일 수도 있겠지만 1년 넘게 살다 보니 나름 괜찮은 것 같다. 비가 하루 종일 온다면 지루하겠지만 비가 오다가도 해가 반짝 나고, 햇살이 좋아서 우산 없이 산책을 나가면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낭패를 겪는, 변덕스러운 날씨는 매력적이다. 내게 런던이 그랬듯이 말이다. 몇 주전에 딱 하루 초여름 날씨처럼 온도가 올라간 이후로 다시 전형적인 봄으로 돌아온 비토리아에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아침에도 비가 오고 있다. 오후에 한국어 수업이 있는데 출근할 때쯤에는 그치겠지? 


Rainy Day by The Drawing Hand, 2012


ZOOM으로 한국에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들 내 옷차림에 깜짝 놀랐다. 여전히 스웨터나 긴팔 티셔츠를 티셔츠 위에 덧입고 있고 심지어 지금은 가벼운 머플러까지 두르고 있으니까.


"스페인은 아직도 그렇게 추워?"

"한국은 엄청 더워. 어제부터 에어컨 켰다니까."

"서울은 벌써 여름이야."


지난 겨울의 길이는 나와 친구들 서로 비슷했던 것 같은데 봄은 좀 다른가 싶다. 춥다고 말하기에는 아직도 겨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망설였다. 겨울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는 걸. 두 달이나 집 앞 공원에 만개한 꽃나무와 들꽃을 보면서 황홀했는데 이제 와서 춥다고 해버리면 겨울에 비해 확연히 따뜻한 봄날에 너무 미안하다. 


"춥다기보단 여기는 아직 봄이야."

"여긴 봄이 서울보다 좀 더 긴 것 같아." 


스페인 전국의 봄이 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사는 스페인 북부이 있는 작은 도시 비토리아는 봄이 머무는 시간이 길다. 이 곳에서 지낸 첫 번째 봄은 작년이지만 Lockdown으로 집에만 있었어서 봄의 시작만 확실하고 계절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 그렇지만 올해 봄은 확실히 서울의 봄보다는 길다는 걸 알겠다. 두 달 가까이 집 근처 공원 산책을 황홀하게 만들었던 꽃나무, 이제는 중간중간 비와 바람에 꽃잎은 날려 보내고 새로 나온 여린 연녹색의 잎사귀로 옷을 갈아입었다. 눈 돌리면 마주치는 나무들이 만개하던 꽃은 졌어도 여전히 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돌이켜보면 서울에서 살던 지난 몇 년간 봄은 항상 순식간에 지나갔다. 인간의 이기심에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증거라 미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섭섭했다.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계절이라 믿고 겨우내 기다리던 마음도 몰라주고 오자마자 성급히 떠나고 마는 봄. 짧아진 봄 대신 여름이 성급하게 시작하는데 길고도 습하고 더운 계절에는 뭐든 열심히 해도 종종 지치기가 쉽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여름휴가만 기다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피곤한 마음으로 한참 남은 휴식을 꿈꾸며 사는 일상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스페인에 온 지 1년 반 동안 창 밖의 계절은 계속 바뀌었지만 내 마음은 계속 겨울 같았다. 그래서 올봄은 유독 길었던 겨울 뒤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과도 같다. 오랜만에 긴 봄을 살면서 정말 봄과 어울리는 일을 하고 싶다. 창문에 쌓인 먼지도 닦아내고 겨울 옷이며 침구도 정리하고 작년 겨울 잘 버텨준 화분 갈이도 하고. 잊지 않고 내 마음도 잘 챙겨서 뜨거울 여름에도 지치지 않고 지낼 준비를 하며 그렇게 이 봄을 길게 살아야지. 

아, 이 글을 마무리 하는 이 순간 다시 햇살이 비춘다. 역시 변덕스러운 봄, 오래 보자!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인스타그램 : http://instagram.com/thedrawinghand.viva

그라폴리오 : https://grafolio.naver.com/jieunkim

유튜브 : http://youtube.com/thedrawing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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