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를 가장한 실험, 고추장의 힘
명란젓이 몇 달 전부터 그렇게 생각났다. 한국 라면이야 두 군데쯤 있는 중국 마트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대도시에 있는 한인 마트에 주문하면 박스 채도 살 수 있지만 명란젓은 못 찾겠다. 현지 마트에서도 명란젓과 비슷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한 지 수개월 만에 얼마 전 마트에서 통조림에 담긴 huevas de bacalao, 대구알을 샀다. 스페인에 사는 한국인 요리사 분의 블로그를 보니 그분은 가공이 안 된 생선알을 구해서 젓갈 종류를 만들기도 하던데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스페인에서도 생선알을 가공해서 판다는 이야기에 마트에서 다시 열심히 두리번거리다가 찾은 대구알 통조림이다. 패키지 사진으로 보면 딱딱한 빵에 발라 먹는 푸아그라 빠떼(pate) 같은 느낌. 이걸 어떻게 먹지 싶어서 찾아보니 샐러드에 올려 먹기도 하고 빵에 빠떼처럼 말라 먹기도 하나 보다. 스페인 출신 남편은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고 먹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과감하게 시식을 해보자. 뚜껑을 열어보니 형태와 질감부터 명란젓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쪄낸 생선알에 이런저런 재료를 첨가해서 만든, 물론 맛도 매우 다르다. 맹맹하고 이도 저도 아닌 맛이라니. 그 한 입에 실망감이 얼마나 큰지, 재구매 의사 전혀 없음.
속상하다. 저걸 어떻게 먹을지 아니면 버려야 할지. 순간 드는 생각, 원하는 명란젓의 식감은 아니지만 우리 고추장으로 매운맛을 더하면 명란젓을 대체할 수 있다는 기대보다 한참 부족해도 최소한 먹을 만큼은 되지 않을까? 때마침 주방 한쪽에서 잘 숙성된 아보카도를 발견했다. 그래 결심했어, 내일 아침에는 실험을 해야겠다.
아침 식사를 가장한 실험. 머릿속으로 재료와 과정을 구상하면서 의지를 다졌다. 심지어 남편에게 실험 과정도 브리핑해줬다. 드디어 실험 날 아침이 되었다. 마음은 급하지만 글 쓰는 습관부터, 모닝 페이지와 브런치 글까지 쓰고 나니 8시 30분이다. 급히 재료부터 준비한다. 밥을 꼭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밥이 먹고 싶은 날이 가끔(요즘은 조금 자주) 있는 걸 보면 나는 한국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1,2 주에 한 번 정도 밥을 해서 먹고 남은 밥은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먹는데 때마침 어제 점심때 해서 먹고 남은 밥이 있다. 오늘 실험의 중요한 베이스가 되어줄 예정이다. 잠들기 전 머릿속으로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쳤으니 모든 과정은 신속하고 정확하다. 밥을 꺼내 한 숟가락 큼직하게 덜어 그릇에 담았다. 삶아둔 병아리 콩도 꺼내 15알 정도 넣고 그릇은 전자레인지로 직행. 2분이면 적당히 따뜻한 밥이 될 것이다. 재빨리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와 어젯밤 실망감을 준 대구알 통조림을 꺼냈다. 작은 프라이팬을 인덕션 위에 올리고 식용유를 두른다. 기름의 온도가 올라가는 동안 이미 골라둔 아보카도를 손질한다. 과도로 쓱 역시 내 판단은 옳았다. 숙성도가 탁월하다. 커다란 씨까지 제거한 아보카도는 잠시 내려두고 달궈진 프라이팬에 달걀 프라이를 시작했다. 익는 소리를 들으며 불의 세기를 9에서 7까지 낮췄다. 띵, 경쾌한 소리. 전자레인지 속 밥도 준비 완료. 김이 나는 밥그릇 안으로 대구알 한 숟가락을 넣고 비장의 무기 고추장 작은 한 숟가락 넣었다. 껍질을 제거한 아보카도도 밥 위에 올라간다. 반숙으로 완성된 계란 프라이도 아보카도와 밥 위로 위에 덮어줬다. 잊지 않았다. 참기름도 한 숟가락 휙. 이제는 가장 중요한 실험의 결과를 확인할 차례.
내가 설정한 가설은 이렇다.
가설 1. 버려질 대구알 통조림도 고추장이 살릴 수 있는가?
가설 2. 미각 만족도의 변화에 따른 명란젓을 향한 그리움 크기는 차이가 있는가?
마음이 급하지만 침착하게 숟가락으로 따로 노는 대구알 덩어리와 고추장을 잘 섞어준다. 그리고 밥, 아보카도, 계란까지 골고루 비벼서 크게 한 입, 실험 완료.
결론 1. 고추장은 해외 사는 한국인에게 절대 필수 (비교 논문 '떡볶이 소스 연구' 참고)
결론 2. 고추장의 투입으로 미각 만족도는 10배 정도 향상되었고 명란젓을 향한 그리움 크기는 오히려 100배쯤 커진 것으로 밝혀짐
내 명란젓 사랑은 엄마가 잘 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떡볶이라는 걸 친구라면 다 알고 심지어 남편도 알지만 명란젓을 좋아하는 내 입맛을 아는 건 엄마뿐일지도 모른다. 명란 파스타처럼 요리에 올리가는 명란 말고 반찬으로 먹는 명란젓은 집이 아니면 딱히 먹을 기회가 별로 없지 않던가. 가끔 엄마랑 마트에 가면 젓갈 코너 앞에서 엄마는 내게 "명란젓 살까?"라고 물었다. 이미 반찬거리를 다 정하고 온 엄마가 굳이 내게 물어보는 건 명란젓은 우리 가족 중에서 내가 특히 애정 하는 특별 반찬이기 때문이다. 딸내미가 좋아한다고 일부러 사 온 명란젓을 정작 딸이 너무 바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상해서 버릴 때가 가끔 있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안타까워했다. 이젠 명란젓을 좋아하는 딸내미도 더 이상 집에 없으니 우리 엄마 명란젓을 사는 일도 없고 버리는 일도 없을 테지.
엄마는 못 먹고 버린 명란젓이 더 아까울까, 밥도 챙겨 먹을 틈도 없던 딸이 더 안쓰러울까.
나는 정말 명란젓이 그리운 걸까, 명란젓을 챙기는 우리 엄마가 그리운 걸까. 실험할 필요도 없는 가설만 남았다.
엄마, 서울 가면 맛있는 명란젓 사주세요.
그때까지 실험 정신으로 밍밍한 대구알에 고추장 섞어서 버텨 볼게요.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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