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학습은 하고 싶은 말을 찾고 모으는 과정
한국어 수업을 하면서 어느 한국어학당에서 만든 책을 교재로 쓰고 있다. 한국으로 한국어 공부를 하러 온 외국인 학생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서 그런지 한국에 대한 소개가 많고, 외국인이 한국에서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며 문법과 어휘를 설명하고 있다. 영어로도 문법 설명이 되어 있어서 초보 한국어 강사에게 이 교재는 고맙고 듬직한 가이드이자 동료이다.
그렇지만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국어 수업을 하다 보면 이 교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나의 학생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한국 생활을 주로 말하면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며칠 전만 해도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설렁탕'이라는 음식을 설명해야 했다. 게다가 '말다'라는 동사를 이용해서 먹는 법까지 설명하자니 진땀이 났다. 게다가 김밥도 말아야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던가. 그 차이를 설명해주고 싶지만 학생들에게 굳이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구글에서 찾은 사진 자료로 설렁탕에 밥을 말아서 먹는 것을 함께 보여주었다. 한국 식당이라도 쉽게 갈 수 있는 대도시에 있다면, 물론 코로나가 없는 상황에서, 같이 가서 먹어보자고 할 텐데. 그마저도 힘든 이 곳에서는 실제로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한국 어학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보다 교재 예문을 훨씬 어렵다고 느끼는 나의 학생들이다.
어쩌다 보니 한국어 강사가 된 나는 이런 아쉬움 때문에 교재 밖의 이야기도 자주 챙긴다. 교재 밖에서도 자료를 찾아 학습을 도와줘야 한다. 교재를 가지고 말하는 한국 이야기가 수업의 절반이라면 그 나머지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스페인 그리고 비토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교재에서 읽은 한국의 사계절을 이해하고 표현을 알고 난 다음에는 지금 살고 있는 도시, 스페인 비토리아에서 서로가 감각하는 계절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어떤 날씨를 묘사하거나 날씨를 느낀 감정을 말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아무리 한국 사람이라도 모두가 똑같이 계절 변화를 느끼고 계절 활동을 하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어 우리 가족은 집 앞 공원의 단풍나무를 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명한 산으로 '단풍 구경'을 목적으로 가 본 적은 없다. 물론 그렇게 확신하기에는 부모님은 젊었을 때 단풍 구경을 가 보신 적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어를 바꿔야겠다. 나는 혼자 혹은 가족과 함께 유명한 산으로 '단풍 구경'을 위해서 가 본 적 없다. 유명한 설악산 단풍도 고속도로 차 안에서 스쳐가면서 본 것이 전부다. 가을이 좋다. 내게 가을은 봄만큼이나 길게 즐기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이면 아파트 입구의 은행나무길은 눈부신 노란빛으로 아름답고, 설악산 단풍은 멀리서 스치며 봐도 황홀했다. 한국의 가을은 전 세계에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단풍 구경'은 내가 가을을 말할 때 쓸 표현은 아니다. 또 다른 수업에서는 '독서의 계절'이라는 표현을 이야기하다가 자신은 여름휴가 때 책을 가장 많이 읽는다는 한 학생의 말에 한참 웃었다. 맞아, 독서는 사계절 내내 할 수 있는데 말이야. 물론 '독서의 계절'이라서 그런지 가을이면 어쩐지 책 한 권이라도 더 사고 싶어지긴 하지만.
어쩌다 한국어 강사가 되어 스페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며 나의 외국어 공부를 다시 생각한다. 외국어를 배울 때 흥미와 재미를 잃지 않으려면 스스로 할 수 있는 말 '진짜 표현'이 많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한 달 내내 'Me llamo Jieun(내 이름은 지은이야.)'만 반복하다가 코로나와 함께 안타깝게 끝나버린 내 첫 번째 스페인어 수업은 정말 재미없었으니까. 처음에는 아는 단어도 없고 사용할 수 있는 문장도 한계가 있으니 매번 같은 자리에 머무는 느낌이다. 그래서 외국어 공부가 어렵다. 진짜 문장다운 문장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그 시간을 버틸 인내심도 필요하다. 어느 정도 제법 다양한 문장을 말할 수 있어도 외국어는 여전히 어렵다. 여행용 서바이벌 영어로 길은 찾고 물건은 살 수 있지만, 우연히 만난 여행자와 대화를 나누기는 쉽지 않아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대화를 이어가려면 책에 나온 예문만 쓸 수는 없다. 하고 싶은 말을 꾸준히 생각하고 그 언어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외국어뿐만 아니었다. 내겐 그림이 그랬고 지금은 글도 그렇다. 평소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면 그리거나 쓸 거리만 찾다가 시작도 못하고 주저한다. 언어 학습은 하고 싶은 말을 찾고 모으는 과정이다. 마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쓸 때처럼 쓰고 지우고 고쳐 쓰고, 결국 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얼마 전부터 다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스페인에 온 지 1년 반, 학원 수업이 멈춘 지 1년 만이다. 당분간은 독학을 해 볼 작정이다. 훌륭한 원어민 강사가 두 명이나 한 집에 사니까 누가 뭐래도 학습 환경은 탁월하다. 이제부터는 내 몫이다. 여전히 내 스페인어는 나의 한국어 초급반 학생들보다도 부족하지만 내 이름 말고도 점점 스페인어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고 있으니 언젠가 가속도가 붙을 거라고 믿는다. 하루에 하나씩 내 '진짜 표현'을 찾아서 교재 밖 스페인어로 된 내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줄 수 있을 때까지, 천천히.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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