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Drawing Hand May 21. 2021

020 진짜 표현

언어 학습은 하고 싶은 말을 찾고 모으는 과정

한국어 수업을 하면서 어느 한국어학당에서 만든 책을 교재로 쓰고 있다. 한국으로 한국어 공부를 하러 온 외국인 학생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서 그런지 한국에 대한 소개가 많고, 외국인이 한국에서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며 문법과 어휘를 설명하고 있다. 영어로도 문법 설명이 되어 있어서 초보 한국어 강사에게 이 교재는 고맙고 듬직한 가이드이자 동료이다. 


그렇지만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국어 수업을 하다 보면 이 교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나의 학생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한국 생활을 주로 말하면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며칠 전만 해도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설렁탕'이라는 음식을 설명해야 했다. 게다가 '말다'라는 동사를 이용해서 먹는 법까지 설명하자니 진땀이 났다. 게다가 김밥도 말아야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던가. 그 차이를 설명해주고 싶지만 학생들에게 굳이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구글에서 찾은 사진 자료로 설렁탕에 밥을 말아서 먹는 것을 함께 보여주었다. 한국 식당이라도 쉽게 갈 수 있는 대도시에 있다면, 물론 코로나가 없는 상황에서, 같이 가서 먹어보자고 할 텐데. 그마저도 힘든 이 곳에서는 실제로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한국 어학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보다 교재 예문을 훨씬 어렵다고 느끼는 나의 학생들이다.  


어쩌다 보니 한국어 강사가 된 나는 이런 아쉬움 때문에 교재 밖의 이야기도 자주 챙긴다. 교재 밖에서도 자료를 찾아 학습을 도와줘야 한다. 교재를 가지고 말하는 한국 이야기가 수업의 절반이라면 그 나머지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스페인 그리고 비토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교재에서 읽은 한국의 사계절을 이해하고 표현을 알고 난 다음에는 지금 살고 있는 도시, 스페인 비토리아에서 서로가 감각하는 계절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어떤 날씨를 묘사하거나 날씨를 느낀 감정을 말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아무리 한국 사람이라도 모두가 똑같이 계절 변화를 느끼고 계절 활동을 하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어 우리 가족은 집 앞 공원의 단풍나무를 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명한 산으로 '단풍 구경'을 목적으로 가 본 적은 없다. 물론 그렇게 확신하기에는 부모님은 젊었을 때 단풍 구경을 가 보신 적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어를 바꿔야겠다. 나는 혼자 혹은 가족과 함께 유명한 산으로 '단풍 구경'을 위해서 가 본 적 없다. 유명한 설악산 단풍도 고속도로 차 안에서 스쳐가면서 본 것이 전부다. 가을이 좋다. 내게 가을은 봄만큼이나 길게 즐기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이면 아파트 입구의 은행나무길은 눈부신 노란빛으로 아름답고, 설악산 단풍은 멀리서 스치며 봐도 황홀했다. 한국의 가을은 전 세계에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단풍 구경'은 내가 가을을 말할 때 쓸 표현은 아니다. 또 다른 수업에서는 '독서의 계절'이라는 표현을 이야기하다가 자신은 여름휴가 때 책을 가장 많이 읽는다는 한 학생의 말에 한참 웃었다. 맞아, 독서는 사계절 내내 할 수 있는데 말이야. 물론 '독서의 계절'이라서 그런지 가을이면 어쩐지 책 한 권이라도 더 사고 싶어지긴 하지만. 


어쩌다 한국어 강사가 되어 스페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며 나의 외국어 공부를 다시 생각한다. 외국어를 배울 때 흥미와 재미를 잃지 않으려면 스스로 할 수 있는 말 '진짜 표현'이 많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한 달 내내 'Me llamo Jieun(내 이름은 지은이야.)'만 반복하다가 코로나와 함께 안타깝게 끝나버린 내 첫 번째 스페인어 수업은 정말 재미없었으니까. 처음에는 아는 단어도 없고 사용할 수 있는 문장도 한계가 있으니 매번 같은 자리에 머무는 느낌이다. 그래서 외국어 공부가 어렵다. 진짜 문장다운 문장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그 시간을 버틸 인내심도 필요하다. 어느 정도 제법 다양한 문장을 말할 수 있어도 외국어는 여전히 어렵다. 여행용 서바이벌 영어로 길은 찾고 물건은 살 수 있지만, 우연히 만난 여행자와 대화를 나누기는 쉽지 않아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대화를 이어가려면 책에 나온 예문만 쓸 수는 없다. 하고 싶은 말을 꾸준히 생각하고 그 언어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외국어뿐만 아니었다. 내겐 그림이 그랬고 지금은 글도 그렇다. 평소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면 그리거나 쓸 거리만 찾다가 시작도 못하고 주저한다. 언어 학습은 하고 싶은 말을 찾고 모으는 과정이다. 마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쓸 때처럼 쓰고 지우고 고쳐 쓰고, 결국 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Love letters by The Drawing Hand, 2013


얼마 전부터 다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스페인에 온 지 1년 반, 학원 수업이 멈춘 지 1년 만이다. 당분간은 독학을 해 볼 작정이다. 훌륭한 원어민 강사가 두 명이나 한 집에 사니까 누가 뭐래도 학습 환경은 탁월하다. 이제부터는 내 몫이다. 여전히 내 스페인어는 나의 한국어 초급반 학생들보다도 부족하지만 내 이름 말고도 점점 스페인어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고 있으니 언젠가 가속도가 붙을 거라고 믿는다. 하루에 하나씩 내 '진짜 표현'을 찾아서 교재 밖 스페인어로 된 내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줄 수 있을 때까지, 천천히.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인스타그램 : http://instagram.com/thedrawinghand.viva

그라폴리오 : https://grafolio.naver.com/jieunkim

유튜브 : http://youtube.com/thedrawinghand    


매거진의 이전글 019 어쨌든 그리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