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니까, 오늘이니까
마지막으로 '오늘의 기록'이 작년 5월 언제라니... 그동안 수많은 '오늘'이 있었는데도 기록이 없으니 마치 긴 잠에서 막 깨어난 기분이다. 그렇다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는 아니고 알람을 여러 번 무시하고 끄다가 결국 어렵사리 눈을 뜨고 나니 집안은 조용하고 가족이 제각각 직장이든 학교든 어디로든 나가고 없다. 문득 온 세상에서 나만 혼자서 이 모양 이 꼴이군, 허탈함이 밀려오지만 덩달아서 또 배도 고파서 냉장고 문을 열고 서 있는 듯한 딱 그 느낌이다.
브런치에 마지막으로 로그인한 것도 꽤 오래전이라서 기억나지 않는 카카오톡 비밀번호를 찾느라 시간이 걸렸다. 기억나지 않는 비밀번호를 기억하느라 시작도 하기 전에 맥이 빠진다. 솔직히 굳이 다시 '브런치'일 필요도 없고 다른 플랫폼이나 핸드폰 메모장, 디지털이 싫다면 책상 위 아무 노트나 골라서 쓸 수 있는 게 글이고 일기인데 포기할까 싶었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게도 오늘이 2022년 3월 3일이니까.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날이지 않나? 3월이니까, 무엇보다 오늘이니까.
비밀번호 조합을 다시 찾느라 시간은 걸렸지만 마침내 나는 내 계정의 주인으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이미 낯설어진 나의 흔적을 살핀다. 작년 봄에도 '시작'했다. 내 시간을 챙겨서 적극적으로 살고 사소한 일상을 관찰하며 기록하는 삶을 '시작'했다. 그런 시간을 '끝'내지는 않았지만 어설프게 사라졌다.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었는지 되새기는 자체가 불필요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데 나는 그 사이에 도대체 더 중요한 일이라도 했던 것일까? 대답하기는 힘들다. 글로 기록된 것이 아마도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텐데 모아두지 않았으니 타임라인이 정리가 안된다. 핸드폰에 담긴 사진들을 살피면 굵직한 일들 위주로 기억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매 순간을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사진으로 찍히지 않은 일상, 사진으로 찍을 필요도 없이 평범했던 순간(일상 대부분이 그렇지만)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사소한 일상과 감상을 붙잡아서 그림으로도 그리고 글로도 더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매번 말하면서 말과 행동이 어찌나 다른지.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 누가 시킨 적도 없는 일지만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했고 그렇게 시작한다. 아마 또다시 흐지부지 시작만 남아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뭐 다시 시작하기를 선택할 테니까 굳이 사서 걱정은 하지 않기로 한다.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쓰고 있군. 이 기분은 사진으로 남기기 어려운 나의 오늘이니까.
기분은 사진으로 남기기 어렵지만, 사진은 감상을 환기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장 퇴근에 찍은 사진. 바로 오늘 아침에 찍은 사진이다. 예쁜 사진을 찍으려면 빨래 건조대가 신경 쓰이니까 밀어두거나 각도를 달리해서 찍었겠지만 오늘 아침 소파에 앉아서 살짝 추워서 담요를 무릎 위에 두고 앉아서 우리 집의 녹색 공간과 빨래가 말라 가는 공간 너머 창밖으로 아침 하늘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늦잠을 자면 볼 수 없는 하늘이지만 사실 일상적인 풍경이다. 그 일상적인 풍경을 마주하려면 게으름이든 바쁜 일과든 멈추고 응시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구름이 창문 하나에서 다른 창문을 지나고 창문 프레임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