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서비스가 구사하는 제한, 덜어내기, 지연의 언어
하루에도 몇백 번씩 기술이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알람소리, 손목의 진동, 갑자기 튀어나오는 팝업.. 많은 서비스는 우리에게 빠르고, 자동화된, 초개인화 해결책을 제공합니다.
세계적인 기업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선진적인 기술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있다면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고, 손가락만 까딱하면 배송이 오고, 생각하자마자 원하는 것을 바로 얻을 수 있대요.
하지만 저는 모든 서비스가 빠름과 편리함으로 경쟁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조금은 느려도, 소박하고 기본적인 기능이어도 자신만의 가치를 적절한 언어에 담아 제공하는 서비스는 그만의 경험을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소개하고 싶은 언어를 구사하는 세 가지의 서비스를 소개합니다.
개성 있는 채소들과 의미 있는 만남
어글리어스는 유통 과정에서 버려질 수도 있었던 농산물을 주기적으로 배송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일반적인 쇼핑 앱에서는 ‘내가 자주 구매한’ ‘내가 좋아할 만한’ ‘무게 당 단가가 가장 저렴한’ 제품을 추천해 줍니다. 당연히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모양과 크기, 무게 규격 내에 들어오는 농산물입니다. 꼭 필요했던 식재료를 주문하면 다음날 아침 반짝반짝 예쁘게 포장되어 집 문 앞에 놓여있습니다.
반면 어글리어스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처음 보거나 다뤄보지 않은 채소를 받게 될 수 있습니다. 못생기고 크기가 제멋대로라 선별 과정에서 탈락하는 채소일 수도 있고요.
어글리어스는 '규격 외' 대신 '개성 있는 모양', 구매하기 대신 '채소 구출하기'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언어는 사용자가 팔리지 않고 남은 채소를 구매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회적으로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가치를 부여하도록 합니다. 사용자의 관점을 바꾸는 힘이 있는 것이죠.
이런 어글리어스의 언어는 채소 장보기를 재미있고, 의미 있는 행위로 탈바꿈시킵니다.
게다가 선택지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식재료들을 만나 조합을 만들고, 요리하고, 먹는 행위까지 깜짝 선물처럼 특별하게 느껴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 하나만으로 충분한, 나만의 디지털 책갈피
Pocket은 인터넷에서 발견한 자료와 링크들을 모아주는 서비스입니다. 이 서비스는 가장 기본적인 링크 저장 기능을 제공합니다. 다른 앱에서, PC로 브라우징을 하던 중에도 기본 공유 기능을 활성화하면 웹페이지를 바로 저장할 수 있습니다.
저장, 그리고 간단한 분류 기능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 외의 부가적인 기능도 있지만 저장 기능만이 가장 강조되어 있고 그 외는 모두 숨어있거나 절제되어 있습니다.
저에게는 사용법을 더 배울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정말 필요한 기능인 '한 데 모아 다시 읽기'라는 기능만을 분명하게 이 서비스의 절제된 언어가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잠깐의 지연을 통해 스스로 SNS 충동에서 벗어나기
One Sec은 모바일 사용 제한 서비스입니다. 이 서비스는 특정 앱을 실행하면 잠깐 화면을 가려 앱으로 바로 진입할 수 없게 잠깐의 시간 텀을 만든 뒤 앱에 진입할지 선택하게 합니다. '사용하지 않음'을 선택하면 앱이 종료됩니다.
iOS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스크린타임 기능은 설정한 시간제한을 넘겨 사용한 앱을 단칼에 차단합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멀어지기 위해 스크린타임 제한이나 시간 기록 앱 등 다양한 서비스를 사용해 봤지만 오히려 제한시간 내에서는 더욱 집착적으로 핸드폰을 붙들고 있게 되더라고요.
반면에 One Sec은 지연이라는 요소를 통해 사용자에게 자신의 행동과 목적을 의식하게 만듭니다.
심호흡을 지나 사용 현황 숫자를 마주하면 마치 누군가 내 어깨를 지긋이 감싸 쥐고 "몇 분 전에 봤는데... 이렇게나 자주 확인했던데... 정말 열어볼 건가요?"라고 묻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면 사실은 내가 별다른 이유도, 생각도 없이 소셜 미디어 앱을 클릭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스스로 먼저 묻게 돼요.
아, 나 진짜 필요한 상황인 건가?
일반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UX는 사용자를 덜 생각하게 하고, 행동의 단계를 줄이는 데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이 서비스는 조금은 다른 목적 달성을 위해 반대로 앱 실행에 도달하기까지 단계를 추가하고, 그 틈에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다른 행동을 선택하게 유도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언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어(言語)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
이 정의를 서비스에 적용해 보자면-
서비스의 언어는 서비스가 표면적으로 구사하는 Text Writing 뿐 아니라, 사용자에게 접근하는 비언어적 방식, 강조하고 숨기는 요소 등 서비스의 가치를 표현하는 총체적인 애티튜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공지능이 이끄는 트렌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분야에서든 속도, 효율, 초개인화를 추구해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소개한 서비스들은 그런 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언어를 구사합니다.
선택을 제한하고, 덜어내고, 의도적인 지연을 만듦으로써 가치를 전달하는 서비스의 언어로부터 기획에 있어 더 넓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여유로움을 배웁니다.
어글리어스
https://getpocket.com/en/about/
One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