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모리의 정원>에 대한 스포일러가 ‘살짝’ 있습니다. 그러나 스포일러를 알고 봐도 괜찮을 영화입니다.
모리의 우주, 모리의 정원
화가인 모리(야마자키 츠토무) 씨는 정원에 삽니다. 정확히는 자신의 정원에서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채 집 안에만 머물러요. 아흔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건강한 모리는 아침식사를 뚝딱 해치우고 허리춤에 가방 하나를 두르고 꼬깔 모양의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자신의 정원으로 출근합니다.
정원에서 뭘하냐고요? 꽃과 나무, 동물과 곤충을 관찰하는 일이 전부예요 아, 바닥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를 보는 것도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일이고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모리에게는 중요한 일이고, 때문에 무척 진지합니다. 그래서 멀리서 손님이 찾아와도 정원을 관찰하는 과업을 멈출 수 없어요.
그런 남편의 일을 방해하지 못하는 아내 히데코(키키 키린)는 손님에게 이렇게 말하며 난처해합니다.
“연못의 송사리를 보느라 바쁘다고 하네요. 이제는 벌레를 보고 있네요.”
정원을 이렇게 진지하게 관찰한다고 해서 관찰 일기라도 쓰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정원에 있는 모든 대상에 차고 넘치는 애정을 쏟는 것만은 분명하죠. 풀잎에 다가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봐도 그래요.
“여태 자라고 있었는가.”
작은 돌 하나를 주워서는 대화하듯 역시 이렇게 묻습니다.
“어디서 날아오셨나.”
그리고 허리에 묶은 가방에 소중히 담아갑니다. 마치 함께 집에 가자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는 2020년에 개봉한 영화 <모리의 정원>(감독 오키타 슈이치)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일본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1880~1977)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세상을 떠나기 전 30여 년 동안 자신의 정원에서 나가지 않은 채 살았다는 화가인데요. 이렇게만 설명하면 집의 정원이 얼마나 넓기에 거기에서만 살았을까, 할 수도 있겠어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모리의 정원이 부감숏으로 그려지는데요. 영화에서 묘사한 정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리에게는 그 정원이 하나의 세계, 우주였을 겁니다. 정원의 크기보다 중요한 건, 그곳에서 무얼 보고 느끼고 생각했느냐겠지요.
흔히 시야를 넒히기 위해 여행을 떠나라고 합니다. 자신이 사는 나라는 물론 해외까지 말이죠. 마치 지구에 남긴 발자국의 거리만큼 생각의 면적과 깊이가 비례한다고 믿는 이야기 같아요. 저도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만, 모리를 보며 생각이 좀 더 넓어졌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30년 전까지 모리가 여행한 세계는 자신의 정원이 전부였습니다. 정원 여행만으로도 충분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넓이를 측정하는 세상의 수치로만 보면 몇 제곱미터에 불과했겠지만, 화가 자신의 예술과 행복을 실현하는데 정원 여행만으로 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모리가 정말로 정원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냐고요? 영화에서 확인해보시죠.
윤선도의 무릉도원, 보길도 부용동 정원
영화를 보며 모리처럼 오랜 시간 특정 공간에 머물며 자신의 예술(또는 학문) 세계를 완성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오래지 않아 떠오른 이름이 하나 있었는데요. 바로 고산 윤선도(1587~1671)입니다.
윤선도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작년 가을 보길도로 아내와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에요. 보길도는 세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세연정과 동천석실을 다시 보고 싶어 10여 년 만에 다시 찾았어요.
보길도를 소개하려면 당연히 윤선도부터 이야기해야 합니다. 윤선도는 한때 왕의 신임을 받던 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어요. 당쟁 과정에서 밀려나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했고요. 아들 둘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살던 시기에는 나라의 혼란도 끊이지 않았는데요. 왕(광해군)이 반정으로 쫓겨나는가 싶더니(인조반정, 1623),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 연이어 터졌습니다.
윤선도는 병자호란의 패배로 임금(인조)이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제주도로 떠났죠. 그런데 우연이었을까요, 운명이었을까요. 바다도 윤선도를 그냥 보내줄 수가 없었나봐요. 제주도로 향하는 바닷길에 그만 풍랑을 만나 어쩔 수 없이 보길도로 피신했는데요. 그만 섬 풍경에 반해버린 거예요.
윤선도는 보길도에서도 연꽃 같은 풍경을 닮은 자리에 ‘부용동’이라 이름을 짓고는 이곳에 ‘낙서재’와 ‘동천석실’, ‘세연정’ 등을 지었습니다. 이들은 ‘부용동 정원’이라고 불러요.
‘낙서재’는 윤선도가 평소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입니다. ‘동천석실’은 그 건너편 산중턱 높은 곳에 주변 경치를 조망할 수 있게 지은 작은 정자입니다. 도로에서 올려다보면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정자를 만들었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까마득해보이지만 숲길을 따라 올라가볼 만합니다. 동천석실 정자 앞에서 내려다보는 보길도의 풍광이 대단하거든요.
마지막으로 ‘세연정’은 정원인데요. 그 풍경이 압권이에요. 정자를 중심으로 물길과 바위가 한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입니다. 윤선도는 세연정에 있는 바위 하나에도 정성스럽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요. 연못 주변을 따라 걸을 때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져요. 세연정에 가보면 윤선도처럼 며칠이고 머물며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거예요. 저와 아내는 세연정의 정자에 앉아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풍경만 바라보았어요. 충만한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세연정과 동천석실, 낙서재까지가 윤선도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릉도원이었을 거예요.(보길도에 가신다면 세연정에서 출발해 동천석실 까지 걸어서 둘러보실 것을 추천드려요. 조용한 산책 길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름엔 더위 조심!)
모리가 자신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렸다면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시를 썼습니다. 그중 <어부사시사>란 시가 유명합니다. 어느 봄날, 배를 띄우는 어부의 모습을 노래한 부분을 일부 옮깁니다.(윤선도가 지은 <오우가>도 유명합니다.)
앞 강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떠라 배 떠라
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려온다
지국총(至匊悤) 지국총 어사와(於思臥)
강촌(江村)의 온갖 꽃들 먼빛이 더욱 좋다
날이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하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 병은 실었느냐
<어부사시사>(부분)
윤선도가 보길도에 머문 세월은 13년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했던 낙서재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영화 <모리의 정원> 마지막 장면에서 모리와 히데코는 인상적인 대화를 나눕니다.
“인생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몇 번이라도 다시 살 거야. 지금도 더 살고 싶은 걸. 사는 게 좋아.”(모리)
“이렇게 오래 살 줄이야.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일찍 죽어버렸는데.”(히데코)
“당신 이제 슬슬 학교 갈 시간이지 않아요?”(히데코)
“다들 학교에 안 가서 좋겠어.”(모리)
학교에 가라는 아내의 말에 모리는 무척 가기 싫어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학교로 사라집니다. 학교가 어딘지는 영화에서 확인해보세요.
여러분은 나만의 우주와 같은 공간이 있나요? 여러분의 정원은 어디인가요?
※ 영화 <모리의 정원>에 대한 추가 감상 메모
- 주인공 모리 역을 연기한 야마자키 츠토무는 이 영화의 감독 오키타 슈이치와 함께 전작 <딱따구리와 비>를 촬영하던 중 자신이 좋아하던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에 대해 감독에게 이야기를 해줬대요. 야마자키의 이야기를 들은 오키타 감독은 모리카즈에 대한 실화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고 주인공은 당연히 야마자키가 맡았다고!
-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전작 중에는 한국인에게도 사랑 받은 <남극의 쉐프>가 있습니다.
- 키키 키린과 야마자키 츠토무는 일본 영화 대표 배우입니다. 두 배우의 빛나는 연기를 볼 수 있는 것 또한 이 영화의 매력입니다. 키키 키린의 유작으로서도 의미가 크고요.
※ 보길도 여행 메모
- 함께 올리는 보길도 사진은 작년 여행 때 찍은 겁니다.
- 혹, 보길도 여행 사진이 있으신 분 중 사진을 보내주시면 다음 <궁궐에서 온 편지>에 소개해드릴게요.
보길도,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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