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원이 될 수는 없겠지만
고단한 취준 기간을 끝내고 그토록 바라던 첫 자취를 하게 된 날, 난 코딱지 만한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어떤 사람의 인생도 만만하지 않겠지만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학창 시절을 보낸 나의 유일한 소원은 독립이었다.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시절, 집에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어도 결국 집에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던 당시 느낀 무력감이 상처로 남은 탓이었다. 하지만 매일 같이 독립을 외치던 투사는 그토록 바라던 소원을 이루게 된 날 처음 맞닥뜨린 자취방의 숨 막히는 정적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후 혼자 잠에 드는 게 무서워 집에 있는 불이란 불은 다 키고 텔레비전까지 틀어 놓고도 밤을 꼴딱 새 버렸으니 참으로 멋없고 그간의 소원이 무색해진 날이었다.
하지만 처음 맞닥뜨린 자취생의 숙명-외로움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쉬는 날 없이 살아온 그간의 생활이 익숙해진 탓인지 직장생활을 하며 누리게 된 여가시간이 되려 고문이 된 것이었다. 대외활동부터 아르바이트까지 늘 할 일에 치여 살다 드디어 마주한 여유 앞에 나는 기쁨이 아닌 무료함을 느끼며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된 삶이 모습이 고작 이런 모습이라니. 기계 같은 출퇴근을 반복하며 되뇌었다. ‘정말 이게 맞아?’
그러던 와중에 이런 상황을 모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첫 독립을 마주한 손녀가 굶기라도 할까 싶어 며칠에 한 번씩 박스가 터져라 직접 수확한 채소를 보내기 시작했다. 마트에 진열된 그것들과 달리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채소들은 손질에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 가족이 몇 끼는 먹고도 남을만한 양은 정말이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코끼리처럼 채소만 뜯어먹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결국 나는 밭주인 내외에 대한 감사함과 원망을 함께 느끼며 생전 집어보지도 않았던 요리 도구에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맛의 향연이 이어졌다. 비린내가 나는 찹스테이크, 신 카레, 무맛 된장찌개⋯. 그들의 사랑이 담긴 채소를 차마 버릴 수 없어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째 공을 들여 낭비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몇 번의 어설픈 요리에도 먼 길을 온 각종 농산물들은 여전히 많아서 음식 모양의 요상한 무언가를 만들고 꾸역꾸역 먹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게 무슨 소질 없는 요리에 개고생인가 싶지만 요상한 무언가에서 차츰 음식에 가까운 먹거리를 만들게 되면서 나는 요리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조리과정을 아는 일은 20년이 넘게 매일같이 가져온 그간 식사와는 다른,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을 채워주었기 때문이었다. 각기 다른 재료들을 손질하고 각종 양념을 첨가한 후 완성된 요리를 접시에 옮겨 담고 나면 산뜻한 뿌듯함도 차올랐다. 요리에는 정답이 없어서 제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점도 꼭 마음에 들었다. 요상한 맛만 내다 어쩌다 한번 나만의 특급 레시피를 발견하게 되는 날엔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졌다.
이후 요리에 재미를 붙인 나는 국과 반찬부터 시작해 양식에 이르기까지 각종 요리에 도전하게 되었다. 어느 날엔 무슨 자신감이 들었는지 못 먹고 다닌다는 회사 동료들-다른 자취생들을 불러 밥을 해주었고 그들의 (아마도 예의 치레였을) 무한 칭찬에 힘입어 그만 자취방을 ‘지홍바(bar)’로 비공식 오픈하기에 이른다. 사실 그도 결국 먹고 떠드는 시간이었으나 유난히 외로운 1인 가구가 많은 신도시에서 내가 꾸린 공간과 음식을 통해 유대감을 느낀 어느 날의 기억은 그저 ‘글을 쓰고 살아가고 싶다’던 이전의 꿈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다른 꿈을 꾸기에 충분한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도시에 온전히 홀로인 사람들을 위한 요리사를 꿈꾼다. 칼질은 여전히 불안하고 간도 그때그때 다르지만 그 언젠가는 따뜻하고 건강한 음식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채워주고 싶다. 물론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기에 나는 좀 시끄러운 주인장이겠지만 외로운 이의 지친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면 그 역시도 행복한 일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