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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홍 Feb 07. 2024

Love wins all


 난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사실 그만큼 그들에게서 독립된 인생을 꿈꿔왔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내가 추구하는 모습이자 내 보잘것없는 자존감을 지켜주던 어떤 호(號) 같은 것들이었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제 그래서 정말 니가 혼자 살 수 있겠느냐고, 그토록 원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생을 살아낼 수 있겠느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난 자신이 없다. 이토록 차가운 인생에서 내가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은 건 그들의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1월 24일(수)

 마취에서 깨고 나니 바로 옆에 수술용 침대 위에 누워있는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와 같은 수술용 모자를 쓴 여자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혹시 여자의 숨이 멎은 건 아닐까 싶던 찰나 복부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의사가 경고한 증상이었다. 아직 수술이 진행 중 인양 우측 복부를 파고들던 통증이 배꼽을 거쳐 좌측까지 퍼져나갔다. 여전히 평화롭게 잠들어있는 옆자리 환자의 얼굴을 보며 짐승처럼 울다 마약성 진통제가 주입되고 통증대신 오한과 메슥거림이 시작됐다. 진통제 부작용이었다. 구역질까지 시작되자 간호사들의 분주한 손길이 이어졌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최악이긴 마찬가지였다. 회복실 밖에 있을 엄마가 떠올랐다. 전쟁에 잡혀온 포로처럼 엄말 부르며 울어댔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싶었다.

 

1월 25일(목)

 종양이 사라지면 배도 작아질 거라고 기대했던 나를 비웃듯 배가 풍선처럼 부풀었다. 먹기나 씻기, 배변활동처럼 일상에서 당연하게 해 오던 모든 일들이 어려워지거나 금지되었다. 채혈과 각종 검사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두 시간 간격으로 이루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의 손이 부푼 배처럼 팽팽해져 갔다. 그 손을 잡는 순간만이 유일한 내 위로였다.


1월 26일(금)

 엄마가 없는 사이 배액관에 문제가 생겨 조치를 받고 아파서 울고 있는데 옆자리 환자가 휴지를 들고 찾아왔다. 나와 같은 병으로 입원해 열흘째 금식 중인 중증 환자였다. 그녀와 나는 휴지가 다 젖을 때까지 서로를 보며 말없이 울었다. 치료 과정이 어떤지 알기에 별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마침 그녀도 보호자인 언니가 없을 때에 컨디션이 안 좋아지고 있던 터였다. 유난히 환자 옆에서 그보다 초연한 얼굴을 한 환자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1월 27일(토)

 부작용으로 소량씩 주입하던 마약성 진통제를 빼고 나니 복부의 통증이 심해졌다. 밤새 오른 열은 새벽이 되어서야 내렸다. 병원에 있어도 큰 차도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퇴원을 결심했다. 집에 있던 동생이 짐을 챙기러 병원으로 왔다. 무뚝뚝한 동생의 얼굴에 걱정이 내비쳤다. 연락이 잘되지 않는 동생은 내가 입원한 후로 매일 같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고 했다. 동생은 산만한 덩치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나를 부축했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여니 집 안이 온통 미역국 냄새 천지였다.


1월 28일(일)

 네 개의 눈이 나만 보고 있는 듯 싶었다.


1월 29일(월)

 언니가 내려왔다. 작년 여름에 결혼 후 형부의 근무지로 집을 옮긴 언니는 이제 가족들 중 가장 보기 힘든 얼굴이 된 터였다. 그런 언니가 먼 길을 돌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꽃다발과 함께 등장했다. 침대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둔 노란 꽃다발이 봄처럼 따뜻했다. 언닌 나에게 이제 공포가 된 샤워를 권하더니 서른이 된 동생의 발을 두 손으로 씻겼다. 아직까지 욱신거리는 수술부위가 무서워 웅크리자 걱정하지 말라는 언니의 말이, 정말 괜찮을 것만 같아서 다시 일어나 그녀의 두 손에 내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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