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상 Jan 11. 2020

지하철 냄새를 맡았다

후각이 유독 예민했던 날

하루 종일 냄새를 맡았다.


몇 권의 책을 준다는 핑계로 친구를 만나 목마르도록 수다를 떨었다. 카페에서 물을 한 컵 더 마시기가 눈치가 보여서 턱 밑이 땅겨올 때쯤 자리를 일어섰다. 휴대폰을 보니 밥을 먹기도, 그렇다고 그냥 집에 가기도 아쉬운 16시였다. 어떡하지.. 너무 이른 시각이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평양냉면 먹고 들어갈까, 아니면 시끌벅적한 집회나 좀 보면서 길에서 시간을 축이다 갈까 고민하던 찰나에, 친구는 갈 곳이 있어 보였다.


"교보문고 가려고."


어젯밤 광화문 근처에서 만나자고 하는 순간부터 교보문고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던 터라 바로 같이 가자고 했다.


"교보문고 냄새 좋지. 근데 그 냄새를 몸에 뿌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온 이 시답지 않은 소리가 오늘 내 감각 중 '후각'을 곤두세우기로 결정해버렸다. 교보문고의 시그니처 냄새가 진한 곳과 옅은 곳, 사람들 냄새가 더 많이 느껴지는 곳과 바깥의 겨울 냄새가 더 많이 느껴지는 곳을 넘나들다가 책을 한 권 사서 나왔다. 전에 앞부분을 읽었던 책이라 뒷부분이 궁금해서 샀다. 그 앞부분의 제목이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이었다. 어젯밤에 먹었던 초밥이 떠오르면서 우럭 냄새를 상상했다. 광어랑 비슷하겠지 하면서 서점 밖으로 나왔다. 친구랑 헤어지고 집회가 열리는 지상을 피해 지하철을 택했다. 무한한 냄새의 공간으로 들어선 것이다.


"지하철 타는 사람 특유의 냄새가 있어."
"냄새가 선을 넘어."


작년 6월, 영화 <기생충>에서 이선균이 한 말을 들은 이후로는 지하철을 타면 냄새에 더 예민해졌다. 지하철에서는 휴대폰 아니면 지하철 벽이나 어두운 유리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시각적인 것은 금세 둔해진다. 하지만 냄새는 옆에 누가 있는지에 따라서 계속 변하기 때문에 피곤할 정도로 민감해진다. 특히 오늘은 내 입에서 '냄새'라는 단어가 나왔기 때문에 눈은 서점에서 산 책을 읽고 있었지만, 내 뇌는 코로 들어오는 화학분자에 온통 집중하고 있었다.



저는 1인 1닭 무조건 해요. 라면도 진짜 많이 먹구요.


옆에 서 있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헌금, 십일조 얘기를 하다가 어떻게 주제가 전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자신이 음식을 얼마나 먹는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치킨 냄새, 라면 냄새가 떠올랐다. 함께 얘기를 하면서 내 오른쪽에 앉아있던 남학생의 냄새가 느껴졌다. 무슨 냄샌지 궁금해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집중했다. 아, '닭꼬치'였다. '교회 앞 노점에서 닭꼬치를 사 먹고 오는 길인 건가..' 싶었다. 어릴 때 학원 앞에서 닭꼬치와 계란빵, 땅콩과자 따위를 사 먹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도 겨울이었던 것 같다. 다시 눈은 책으로 향했고, 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숙소로 돌아온 앤더슨은 저녁도 먹지 않고 사진을 인화했다. 따로 암실이 없었기에 방을 온통 어둡게 해 두고 코를 찌르는 인화액 냄새를 맡아가며 한참을 분주히 군 끝에, 그는 마음에 드는 그림 하나를 건졌다.'
(공의 기원, 김희선)


사실 그 시점에 정확히 이 문장을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슷한 시점에 읽긴 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인화액 냄새가 왠지 삭힌 홍어의 냄새와 비슷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상상을 했다. 그때, 내 왼쪽에 앉아있던 분이 일어나면서 내 앞에 서 있던 덩치가 매우 큰 남자분과 입술을 빨갛게 칠한 여자분이  자리의 후보가 되었다. 남자분의 덩치가 너무 커서 옆에 앉으면 상당히 비좁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선을 다시 책으로 떨구었다. 그 때, 여자분의 신발이 가까워진 것이 먼저인지, 그분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게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강렬한 냄새가 훅 들어왔다. 아, 사람 한테서 나는 냄새를 '향기'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냄새'라는 말이 나쁜 의도로 쓰이는 것이 싫다던 어떤 작가의 문장이 꽤 오래전부터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후각 자극을 평등하게 대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의지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것도 있고, <기생충>을 본 영향도 아주 없진 않다. 무튼, 그 여자분의 냄새도 어디선가 맡아본 기억이 있는 냄새였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 안 쓰는 향수를 찾고 싶어 하는 것이다. 누가 맡았을 때, '아 이 냄새~'하고 뻔하게 보이기?, 들리기?, 아니다 냄새니깐 '맡아지기' 싫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어떤 냄새였는지 기억해내기 위해서 가만히 눈을 책에 고정한 채로 들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판소리와 밴드의 신기한 조합을 보러 갔던 공연장 로비의 냄새였다.


적당히 지적이고 문화적인 이미지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그 냄새였다. 잠시 그 날의 기억이 스르륵 스쳐 지나갔고, 다음날 크리스마스의 기억까지 려던 순간 다시 한번 그 여자분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신기했다. 이런 냄새의 향수가 있는 건가. 뭐 하는 사람이지?


닭꼬치 냄새가 나던 그 학생은 어느새 지하철을 내렸고, 나는 왼쪽 여자분의 냄새를 의식하면서 다시 책을 읽어내려갔다. 금세 익숙해져서 적절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책 냄새가 궁금해져서 코를 대보고 싶었지만, 왠지 주변의 냄새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들킬까 봐 참았다. 어느새 내가 내릴 차례가 되었고, 내리자마자 위층 빵집으로부터 내려오는 냄새가 정확하게 내렸음을 알려줬다. 이 역에서는 항상 같은 냄새가 난다. 특히 겨울이라 차가운 공기를 타고 내려와서,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개찰구의 초록색 화살표를 찾으면서 왼쪽 안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낼 즈음에는 지상의 냄새도 희미하게 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동네로 온 것이 확실해졌다. 2번 출구 계단으로 올라와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느 정도 취할 만큼 술을 마시고 잠깐 밖에 나왔을 때,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딱 기분 좋아지는 냄새였다. 이제 익숙한 동네니깐 후각은 좀 쉬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무심하게 집에 돌아왔다.


여섯 개짜리 생수 묶음을 사서 집에 들어오니 특유의 집 냄새가 났다.



돌아왔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