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의 농민항쟁에서 시작하면, 한반도는 1백 년 가까이 전쟁 상태였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건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만 하는 어떤 행위를 뜻한다. 전후에 태어난 우리는 모든 싸움은 이겨야만 한다고 배웠다. 패배자가 되면 어떤 대접을 받는지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생생하게 경험했다. 그러니 축구마저도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온 국민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졌다고 생각하고 그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그게 바로 "졌다, 졌어, 진 거야."라는 반어적인 체념이 아닐까?
- 김연수, '어쩌다 나 같은 사람도 달리게 됐는가?'. [지지 않는다는 말], 7쪽
MMA 파이터 정찬성은 알렉산더 볼카노프스키에게 패배한 후 옥타곤 위에서 쓸쓸하게 말했다. "어느 때보다 자신이 있었다.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좋았고 지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낀 것 같다." 그 기분이 뭔지 알 것만 같다. 그는 이제서야 넘사벽을 느꼈다지만 사람들은 늘 넘사벽에 둘러싸여 산다. 오래전 그가 경기 전 12시간 만에 7킬로그램을 감량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다. 스포츠에 어떤 드라마가 있다면, 그건 오히려 경기 자체가 아니라 그 경기의 준비 과정에 있는 것 같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12개월에 7킬로그램도 빼지 못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격투기의 폭력과 다름없는 마음의 매질을 당하면서 산다. 진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나, 자신의 처지와 싸우며 매번 씁쓸하게 패배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세상은 정말이지 UFC 옥타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붕어빵 장사를 해 볼까 떡볶이 장사를 해 볼까 그랬었어요. 그런데 붕어빵 장사 하기 전에 옷 장사 했잖아요. 앞쪽에 롯데마트 앞에 떡볶이 장사가 또 생겼잖아요. 엄청 잘 되더라구요. 내가 떡볶이 장사를 했었으면 엄청 잘 팔렸겠다 돈을 많이 벌었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롯데마트 나오는 입구에 내가 떡볶이 장사를 하려고 했는데 어떤 아줌마가 해 가지고 "아줌마 여기가 내 자리였어요" 했더니 "하지 왜 안했냐"고 그러더라구요. 옷 장사 했었다고 그랬죠. 여름엔 했었는데 겨울에 추워서 들어갔다고. 또 할 거예요. 성공할 때까지 해야죠. 밀어붙여야죠. 다른 거 바꿔 가지고. 먹는장사가 잘 된다 그러드라고. 떡볶이는 두 대나 생겼잖아. 생각해야죠. 뭐래도 막 팔고 싶어요.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집에 노니깐요. 뭐래도 팔고 싶어요.
- 조은, '세상의 가난, 가난의 세상', [사당동 더하기 25], 210~211쪽
격투기는 잔인한 전쟁이고, 볼카노프스키는 녹록지 않은 인생처럼 너무 강한 상대였다. 격투기나 마라톤 같은 원초적 스포츠의 가장 깊고 경건한 지점은 승부의 마지막 순간이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 된다는 데 있다. 포기하거나, 포기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때려눕혀지거나. 캔버스에 등을 댄 채 볼카노프스키의 파운딩 펀치에 속절없이 난타당할 때, 그의 길었던 도전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계속할 수 있겠느냐는 코치의 질문에 그는 눈도 뜨지 못한 채 "해야죠."라고 답했다. 그 말은 의지나 각오가 아니라 환각에 빠진 체념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자신의 소회처럼 '완벽한 패배'였고, 볼카노프스키와 UFC 챔피언 벨트는 말 그대로 '넘사벽'이었다. 그래서 참, 슬픈 패배였다.
날이 어두워졌다. 도와줘요. 누구 없어요? 도와줘요. 그녀는 계속 반복했다. 누군가 올 것이다. 와야 했다. 그녀는 겁을 집어먹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인생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줄 알았다. "삶은 우리를 때려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
- 제임스 설터/서창렬, '20분', [아메리칸 급행열차], 50쪽
인생은 길고 잔인한 승부인 동시에 오묘하고 복잡한 스포츠다. 정찬성은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으면서 인생의 넘사벽을 맛봤지만 그 쓰라린 패배의 대가로 UFC로부터 88만 2천 달러를 정산 받았다. 그가 15년 동안 프로 격투가로서 번 총 수입의 75%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그야말로 오랜 세월 '포기하지 않았던 포기'의 대가였다. 그래서 그는 볼카노프스키에게 지고, 인생에서 이긴 걸까? 삶의 승부는 간단하지 않다. 이제 그 돈과 경력을 밑천 삼아 유튜브도 만들고 체육관도 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그의 포기는 갑자기 고진감래 해피엔딩이 되는 것 같다. 인생의 목적은 뭘까? 그저 병가지상사, 레프리 스탑도 없는 넘사벽의 막막함. 그래서 두려움과 고통도 그저 견디며 지나가는 순간인 걸까?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6시의 달리기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선 두려움과 고통은 다르다는 점이다. 달리기 직전까지가 힘들지,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두려움 같은 건 사라진다. 더 힘들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사실 더 힘들어지면 사라진다. 반면에 고통은 순수한 경험이라 미리 겪을 수 없지만 분명히 거기 존재한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바깥에 존재한다. 그래서 달리는 내내 열기로 인한 그 고통은 나를 둘러싸고 놔 주지 않는다. 나는 온몸의 감각을 모두 동원해서 그 고통을 맛볼 수밖에 없다.
- 김연수, '기뻐하고 슬퍼하라, 울고 웃으라', [지지 않는다는 말], 19~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