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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chroid Jul 01. 2015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산문 [그늘에 대하여]

 종이라는 물건은 중국인이 발명했다고 들었는데, 서양 종이를 대하면 단순한 실용품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런 느낌도 일어나지 않지만, 당지나 일본지의 결을 보면 거기서 일종의 따스함을 느끼고 마음이 안정된다. 같은 흰 종이라도 서양 종이의 흰색과 봉서지나 백당지의 흰색은 다르다. 서양 종이의 겉은 광선을 되튕기는 듯한 맛이 나는데, 봉서지나 당지의 겉은 포근한 첫눈의 표면처럼, 몽실몽실하게 광선을 안으로 빨아들인다. 그리고 손에 와 닿는 감촉이 보들보들하고 접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뭇잎을 만지고 있는 것과 같이 차분하고 촉촉하다. 본디 우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다. 서양인은 그릇도 은이나 철강이나 니켈로 만든 재료를 써서, 반짝반짝 빛나도록 마구 윤을 내는데, 우리는 그런 식으로 빛나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 쪽에서도 물 끓이는 주전자나 술잔이나 술병 등에 은제품을 쓰는 일이 있다 하나, 저런 식으로 마구 윤을 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표면의 광택을 없애고, 시대에 따라 검게 구워지는 것을 좋아하여, 소양이 없는 하녀가 모처럼 녹이 슨 은그릇을 윤이 나게 닦거나 하여, 주인에게 꾸중 듣는 일이 있는 것은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나는 사건이다. 근래 중국 요리를 담는 음식 그릇은 보통은 은으로 만든 것이 쓰이고 있는데, 아마 중국인은 그것이 고색古色을 띠게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새것일 때는 알루미늄과 비슷한 별로 느낌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중국인이 쓰면 세월이 묻어 우아한 맛이 드는 물건이 되어버리는데, 그렇지 않다면 알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표면에 시구 등이 새겨져 있는 것도 겉이 검어지면서 잘 어울리게 된다. 결국 중국인의 손이 닿으면, 경박스럽고 반짝이는 주석이라는 경금속이, 붉은 진흙처럼 깊이가 있는, 가라앉은, 무거운 물질이 되는 것이다. 중국인은 또한 옥이라는 돌을 사랑하는데, 저 묘하게 살짝 흐린 느낌이 드는, 몇 백 년의 오래된 공기가 하나로 뭉친 듯한, 속까지 거슴츠레하게 둔탁한 빛을 머금은 돌의 딱딱함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우리 동양인만이 아닐까. 루비나 에메랄드와 같은 색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금강석과 같은 광채가 있는 것도 아닌 저런 돌의 어디에 애착을 보이는 것인지, 우리들로서도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그 흐린 표면을 보면 중국의 돌다운 느낌이 들고, 오랜 과거를 가진 중국 문명의 앙금이 저 두툼한 어떤 흐릿함 속에 퇴적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중국인이 저러한 색채나 물질을 선호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끄덕여진다.
                                             

- 다니자키 준이치로/고운기, '그늘에 대하여', [그늘에 대하여], 20~22쪽, 눌와


 몰스킨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고가의 수입노트가 유행했다. 그러나 몰스킨의 헤밍웨이 타령에도 불구하고 만년필과 연필 애호가들은 쿼바디스와 로디아의 압도적인 지질에 감탄했다. 일본산 종이를 사용한 미도리도 독특한 외형의 노트로 눈길을 끌었지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언급처럼 동양만의 '아치'가 있을지언정, 지질의 실용적 측면에서는 탁월하지 못하다. '몽실몽실'한 지질은 만년필을 사용하면 거친 질감 때문에 필기감도 나빠지고 잉크의 번짐도 과도해진다. 무른 느낌의 연필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종이의 미덕이 기록에 있다면 '맨들맨들'한 유럽 종이가 봉서지나 당지보다 우월한 것이 사실이다.

 '두툼한 흐릿함'이 주는 매력이란 쓰임새나 기능의 측면이 아니라 그것이 남기게 되는 손때에 있다. 늙어가는 탐미주의자들에게 기능적 명확함이란 도리어 무용한 것이다. 그리고 동양적 아름다움이란 세월의 더께가 가라앉은 고요한 쇠락 같은 것이다. RGB나 CMYK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먹색'의 그늘은 빛이 만들어내는 쓸쓸한 고요함이다. 손끝에서 사각거리는 당지의 누런색처럼, 그늘이란 지나치게 밝은 것 일색인 세상이 오묘한 어둠으로 아주 천천히 늙은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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