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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chroid Jul 08. 2015

히말라야, 실패의 텍스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자살한 애인이 마지막으로 읽었던 텍스트인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에 매달리면서 낭가파르바트 등반대에 합류한 한 아마추어 등반대원의 이야기다. 그는 참사로 막을 내린 등반일지를 쓴다.


 가장 먼저 이 대설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은 독일의 헤르만 불이었다. 불은 이렇게 말했다. "며칠 후 나는 이 산기슭에 설치된 베이스캠프에서 텐트 앞에 누워 아픈 발을 돌보며 사천 미터보다 더 높은 쌍두봉을 몇번이나 쳐다봤다. 그 쌍두봉 뒤에는 내가 기억하는 고지대의 만년설이 있다. 나는 그 고지대의 만년설 상부를 나의 심안으로 몇시간 동안 살펴봤다. 그것은 내게 하나의 꿈처럼, 다른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꿈처럼 보였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인 꿈처럼 다가왔다."

                                                      

-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110쪽, 2005 


 히말라야 등반은 그 자체로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욕망의 기획이다. 모든 등반대는 히말라야의 비현실적 위엄 앞에서 꿈과 욕망과 현실을 뒤섞은 매혹을 경험한다. 전문적인 산악인이거나 적어도 1억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상업 등반대에 합류하는 대부분의 아마추어 산악인은 거부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유혹에 압도당한 채 극한의 모험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토록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고도 모자라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이런 무모한 도전에 대해 그 누구도 분명하게 동기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끝내 텐트로 돌아오지 못하고 에베레스트의 전설이 된 조지 맬로리가 꼬치꼬치 캐묻는 기자에게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던 일화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1996년 에베레스트 상업 등반대의 참사를 기록한 존 크라카우어의 넌픽션 [희박한 공기 속으로]에서 묘사된 아마추어 원정대의 사연도 그러하다. 사소한 차이를 무시한다면, 그들은 공통적으로 누구에게나 위험하지만 자신에게는 예외일 수 있는 확률을 감수함으로써 발생하는 스릴과 성취감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막상 등반의 절정이라고 할 정상 정복의 기록은 별다를 것 없는 기념사진 같이 맥 빠진 것이 된다. 


 나는 세계의 꼭대기에서 한 발로는 중국 땅을, 또 한 발로는 네팔 땅을 딛은 채 바람을 막기 위해 한쪽 어깨를 숙이고 내 산소 마스크에 달라붙은 얼음을 떼내고는 드넓은 티베트 땅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서도 내 발 밑에 펼쳐진, 무수한 굴곡을 지닌 끝없는 대지가 보기 드문 장관이라는 걸 희미하게나마 의식했다. 지난 몇 달간 나는 이 순간을, 그리고 이 순간의 감격스러운 기분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그러나 막상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서고 나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 존 크라카우어/김훈, [희박한 공기 속으로], 25쪽, 1997


 애초에 나는 그 산 정상에 이를 때면 온 마음이 벅찬 환희로 들끓어 오를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어린 시절 이래 줄곧 꿈꾸고 열망해 온 목표를 막 성취했다. 하지만 그 정상은 반환점에 불과했다. 앞으로 길고도 위험스런 하산 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암담한 기분에 자축을 하고 싶은 충동 같은 건 완전히 사그라들고 말았다.

                                                                               

- 존 크라카우어/김훈, [희박한 공기 속으로], 262쪽, 1997


 등반은 본질적으로 산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텍스트 위를 걷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도전과 모험은 실패와 대참사로 막을 내릴 때 더 강렬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히말라야라는 텍스트는 그래서 실패의 주석을 통해 비로소 실체를 가지게 된다. '그'가 그녀, 또는 연애라는 텍스트에 주석을 시도한 이유도 그것이 결국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의도된 실패의 텍스트를 주석하기 위해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지원한 것이다. 그 기록은 다시 소설 속 화자인 '나'에게 텍스트가 되어 주석으로 읽혀진다.

 '나'는 원본이 없이 일부만 남은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을 연구하는 교수로서 참사로 막을 내린 낭가파르바트 원정에서 남겨진 등반일지를 따라 그의 심리적 궤적을 추적하면서 비극으로 끝난 등반 기록에 주석을 단다. 이러한 주석, 또는 해석의 인과관계는 결국 텍스트의 해석불가능성, 주석을 매개로 한 소통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실패의 텍스트가 된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실패를 상징하는 불길한 징조가 짧게 스쳐간다.


 1988년 한국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서 벌어진 일을 말하면서 당시 원정에 참가했던 대원들은 대부분 이 손바닥만한 구름 한점을 언급했다. 그들에 따르면 이 구름 한점은 자신의 무모한 욕망 때문에 대원들을 죽음의 지대로 몰아넣은 원정대장의 어리석음을 상징했다.

                                                                                

-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145쪽, 2005


 거기서 130미터 위에 있는, 티없이 맑은 코발트빛 하늘 밑에서 찬연한 햇살을 받아 빛나는 산 정상에서 내 동료들은 이 행성의 최정상에 오른 걸 기념하기 위해 국기를 펼쳐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그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들 중의 누구도 자기네의 발 아래에서 끔찍한 지옥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 기나긴 하루가 끝날 즈음에는 1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생사를 좌우할 만큼 소중한 것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 존 크라카우어/김훈, [희박한 공기 속으로], 29쪽, 1997


 몇몇 스타급 산악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직업적 산악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히말라야에 걸쳐 있는 티벳과 네팔이 모두 거액의 입산요금을 징수하기 시작한 이래로 유럽이나 미주에서 히말라야 원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후원이 필요해졌다. 최정상급 산악인이었던 로브 홀과 개리 볼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계속적인 기업 후원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더 위험한 등반을 해야 했고 이는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홀이 1990년 '어드벤처 컨설턴츠'라는 회사를 차리면서 히말라야 상업 등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1인당 6만 5천 달러를 지불하는 아마추어 등반가를 동반하여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보여주는 이 획기적인 사업은 최초에는 그저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상업 등반대 사업에 여러 전문가들이 뛰어들면서 그들조차 이러한 인기가 '필연적으로' 대형 참사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히말라야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상조건이 정상공격의 성패를 좌우한다. 따라서 모든 원정대는 거의 같은 일정으로 정상공격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는 정상 주변에서 심각한 병목현상을 초래하고, 하나의 팀이라는 인식이 결여된 제각각의 사연으로 히말라야 정복에 나선 비전문가들에게 예전에는 감수할 필요가 없던 시간적 지연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기상변화에 대한 대책이 사실상 확률에 맡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날 밤 사우스 콜에서는 다닥다닥 붙은 텐트들 속에 50명도 넘는 사람들이 숙박을 하고 있었으나 모두들 낱낱이 동떨어진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어려 있었다. 강풍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다른 텐트에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받는 것도 불가능했고, 신에게서 버림받은 그 황량한 곳에서 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감정상으로 내 주위의 사람들과 완전히 절연된 기분이었다. 예전에 다른 사람들과 많은 산을 오르내렸지만 그렇게 심한 절연감을 느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 존 크라카우어/김훈, [희박한 공기 속으로], 237쪽, 1997


 산소결핍으로 인한 착각과 비이성적인 결정, 지독한 고산병 증세, 동상, 탈진 등으로 고난에 직면한 대원들은 대화가 중단되고 행동과 몸짓으로 서로를 추측한다. 등반일지를 기반으로 한 산악문학은 이 부분에서부터 픽션을 넘어서는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히말라야를 정복하겠다던 애초의 허망한 욕망은 고산의 산소처럼 희박해지고 끝내는 목적을 상실한 채 맹목적으로 육체를 학대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한다. 생존 가능성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방치된 최고의 에베레스트 전문가 로브 홀은 그의 아내와의 마지막 무전에서 도리어 일상적인 대화를 시도하여 아내를 안심시켰고 아마추어 원정대원 대부분이 극도의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공포감을 상실하거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들의 구조에 나선다.


오늘이 며칠인가? 안자일렌을 하면서 빙하지대를 지나는데, 누군가 묻는 소리를 그는 들었다. 서로 제4캠프로 올라가자고 말한 뒤, 처음 들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대원도 10여 미터 뒤에 있었는데다가 협곡 사이로 세찬 바람이 불고 있어서 그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목소리에 대답했다. 6월 30일이지. 그 사람이 그래서 혼자서라도 정상 등정에 나서겠다고 결심한 모양이군. 글쎄. 지금쯤은 정상 등정을 끝내고 제4캠프에서 쉬고 있을 거야. 그건 검은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149쪽, 2005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앤디 해리스와 만난 일과 아울러 그 소름끼치는 우연의 일치들에 관해 얘기해 줬다. 즉, 애덤스가 그 수수께끼의 인물과 만난 바로 그 장소에서 바로 그 시간대에 내가 해리스와 마주친 일에 대해. 해리스와 나 사이에 오간 얘기는 애덤스가 그 수수께끼의 인물과 나눈 얘기와 섬뜩할 정도로 흡사했다. 그리고 나서 애덤스는 해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거꾸로 얼음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 존 크라카우어/김훈, [희박한 공기 속으로], 314쪽, 1997


 고산 등반을 기록하는 산악문학은 오랜 전통을 가진 인기 장르다. 히말라야 등반이 내포한 초현실적인 욕망 때문에 한계에 봉착한 인간들이 맞이하게 되는 비극은 넌픽션을 픽션처럼 읽히게 만든다. 김연수는 현란한 소설적 테크닉으로 연인의 죽음으로부터 소외된 '그'가 죽음의 체험으로 선택한 낭가파르바트 등반과 그 '설산'을 묘사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시공간적 환상을 결합하여 끝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나'와 '그',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 겨냥한 문학적 알레고리는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애인의 죽음과 관찰자의 시선에서 비극을 기록하는 산악문학의 장르 컨벤션을 교직함으로써 인간은 결국 소통할 수 없으며 세계의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땀으로 범빅이 된 몸으로 바라보는 설산의 모습은 환각에 가까웠다. 봉우리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꿈의 형상으로 보였다. 1988년 낭가파르바트 원정대는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그 최초의 난관을 말한다면 아마도 몬순의 열기 속에서 올려다보던 하얀 봉우리들이리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 하얀 봉우리들은 여름밤의 뒤척이는 잠 속으로 밀려들었다가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꿈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완전히 잠들지도, 그렇다고 깨어 있지도 않은 그 어렴풋한 경계에서 간절히 원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그 꿈들은 우리 영혼을 유혹한다. 한번도 좌절을 모르는 그 꿈들은 자신을 갈구하는 인간들에게 그 모든 패배의 순간을 전가했다.  

                                                                                

-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115쪽, 2005 


 '그'가 왕오천축국전에서 혜초가 묘사한 세계의 끝 소발률,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 지방에 있는 낭가파르바트에서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삶과 기억의 끝에 당도함으로써 비로소 애인의 죽음에 가닿았다는 '나'의 추측은 주석을 다는 행위에는 그 어떤 진실도 있을 수 없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추측이나 짐작에 불과하다는 자백에 이르러 완전히 무화되고 만다. '그'가 원전이 사라진 왕오천축국전의 한 구절에서 출발해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마침내 히말라야라는 거대하고 초현실적인 실패의 텍스트 너머로 사라져버린 것처럼 우리는 끝내 아무것도 알 수 없거나 스스로 그 텍스트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154쪽,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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