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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chroid Jul 21. 2015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사람을 볼 때 51점만 되면 100점 주자,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어야지 꿀 주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진심보다 태도이다, 미워할 것은 끝까지 미워하자, 땅은 원래 사람 것이 아니니 죽을 때까지 단 한 평도 소유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생활신조란 이 쯤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점에서 언뜻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라는 책을 뒤적거렸을 때는 그의 진가를 몰랐다. 역시 모른다는 건 생각보다 큰 차이다. 우리는 흔히 '바다 보러 가자.'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를 아는가? 


 내가 처음 낚시를 배운 것은 일곱 살 때였다. 두 뼘짜리 막대기에 그만큼의 낚싯줄을 달고 어른이 묶어준 바늘에 고동살을 끼워 진대(베도라치)를 낚는 거였다. 치끝에서 동무들과 낚시를 하다 보면 저편으로 노을이 지고, 바다는 푸른색에 붉은색이 덧칠을 했다.

 내 이름 부르던 마지막 아이도 돌아가고 혼자 남아 있던 어느 순간, 문득 사는 게 슬퍼졌다. 먼먼 옛날에도 나는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었던 것만 같은데, 한 백만 년쯤 지난 뒤에는 나는 무엇일까, 모든 게 사라지고 없어지면,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 내가 사라진 다음의 나는 무엇일까, 가당찮게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 한창훈,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106~107쪽, 2015


 저자의 말처럼 바다는 '간혹 <6시 내고향>에서 생선 먹으며 호들갑 떠는 그런 장소'이고 그는 '보통의 국민들에게 관광지의 주민'이다. 바다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다에 놀러가는 것과 다르며 뜨내기는 바다를 결코 알지 못한다. 사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전복적인 생각으로 가득찼을 때, 어선과 작업선을 타며, 질통을 메고 아시바를 걸으며, 소설가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어쩌면 소설가보다는 어부를 직업으로 선택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가난과 외곽을 그리는 소설이 의미를 잃는 시대에 나는 소설가로 살고 있다. 변방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쓴 소설이 나오면 으레 고색스러운 방 하나에 한꺼번에 모아놓고 체크인 해버리는 게 요즘 풍토이다. 토속적이다, 질펀하다, 한마디 내뱉어주면 된다고 여긴다. 평론가들의 모국어 기피, 근친 혐오. 그 배경 속에서 쓰고 있다.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욕망과 만나고, 그렇기 때문에 우울하고, 우울하기 때문에 웬만한 책임은 피할 수 있는 소설이 대부분이다. 대중 속의 고독도 사람의 일이라 작가가 그곳으로 손을 뻗지 않으면 안 되지만, 너무 많이들 어두운 카페로 걸어들어가버렸다. 개인의 우울이 사회의 비참보다 더 크고 강렬해져버린 것. 이른바 문학적이다. 그러나, 문학을 키우는 것은 비문학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파도 더욱 높아가고 바람은 사나워진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땅한 게 없다 하더라도 먹을 게 없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도 배가 고플 것이다. 

                                                                                                                                                 

- 같은 책, 108쪽


 개인의 우울과 사회의 비참이 병렬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이른바 '문학적'이라는 수사가 시시한 감상이 아니라 내면으로 질주하는 어떤 에너지라면, 그래서 결국 어떤 벽을 돌파하는 것이라면 문학적인 것이 도시와 바다를 가릴 일은 아니다. 오히려 바다와 문학은 소란과 고요가 교차하는 도시와 달리 그것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침묵 때문에 견디기 힘든 것이다. 바다가 삶의 터전인 사람들에게 결핍과 고립, 그리고 수평선 같은 무료함은 달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조건이다. 뜨내기들에게는 한바탕 수선스러운 평화인 바다의 막막함이란 알고 보면 그렇게 문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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