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기억의 편집장이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싶은지에 따라 편집 과정에서 특정 부분만 과장되어 남는다. 그리곤 몇 가지 기억을 묶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머지는 언젠가 편집할 재료로써 뇌의 서랍장 깊숙이 넣어둔다. 대부분 있었는지조차 잊고 살아가지만 뜬금없이 서랍이 열리기도 한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책과 관련된 기억이 들어있는 서랍 속 이야기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문학소녀라는 타이틀을 갖기엔 부족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내 인생 최초의 책인 동화책을 거쳐 만화책을 섭렵하고 로맨스와 판타지 소설을 읽다가 몇몇 고전과 현대 소설을 읽었다. 친구들은 나를 책 좋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그건 상대적인 기준에서였다. 또 다른 기준에서 나는 다독가는 아니었다.
독서는 큰 부담 없이 즐기는 취미이자 여가생활에 가깝다. 확 빠져 있다가도 어떨 땐 시큰둥하다. 읽고 싶으면 읽고 읽고 싶지 않으면 거들떠도 안 봤다. 재미를 붙인 책은 단숨에 읽었으나 지루한 책은 딴 생각을 하거나 책장을 덮어버리기도 했다. 종종 끝까지 읽을 수 없는 책이 생겼고 너무 동경해서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책이 생겼다. 내게는 책이 좋다는 말 또한 다의적이다. 문장들이 이루어내는 이야기도 좋고 종이로 만들어진 책의 물성도 좋다. 읽고 싶은 욕구뿐 아니라 소장하고 싶은 욕구도 상당해서 자주 책을 구입하는 편이다. 언젠가부터 책은 습관처럼 내 곁에 머무르고 있다.
책을 통해 조르바를 만났다. 그는 인생을 사는 데 있어 브레이크 따위 없는, 온전히 자신으로 살아가는 대지의 핏줄 같은 인물이다. 내가 가진 (대개는 쓸모없는) 브레이크를 꼭 붙들고 놓지 못할 때마다 용기를 받는다. 테레자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지녔다. 인정과 애정을 갈망하는 한편 스스로의 중심을 찾으려는 그의 모습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소설 이외에 책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건 직장인의 옷을 벗어던지고 대학원에 들어간 이후부터다. 독립과 퇴사에 이어 공부하기로 맘먹었을 때 학문을 위한 독서를 해야 했다. 전공과 관련된 지식서와 그 기반을 이루는 철학과 인문학과 같은 책들은 처음에는 낯설었다. 벼락치기하듯 읽어 내려가다 보면 과식한 듯 온전히 소화되지 못한 활자들이 용수철처럼 튕겨나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름 진득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독서하는 인간으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책에도 결이 있다. 이해하지 못하고 읽었던 책이라도 비슷한 결의 다른 책을 읽으면 그 생각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소설이 허구적 캐릭터와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거라면 에세이는 저자의 생각과 경험이 온기를 불러일으킨다. 시는 모르긴 몰라도 아름다움이 뭔지 가르쳐주고 인문학은 저자의 통찰이 내게로 들어와 지혜로움을 안겨준다.
사회가 연대하듯 책들도 연대한다. 나는 여러 저자의 독자가 되고 나를 중심으로 모인 저자들은 나만을 위한 연대가 된다. 그들의 발자국은 내가 나아갈 길을 만들고 내 안의 흐릿한 사고를 추동하여 바깥으로 끄집어낸다. 덕분에 살아가면서 필요한 지혜와 용기를 얻고, 물리적으로 겪지 못하는 경험들을 추체험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그것은 외로움과 고독, 지루함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준다.
범람하는 책 중에 가끔은 뒤통수를 맞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깝진 않다. 다음에는 부디 비껴갈 수 있도록 해주는 건강한 경험이다. 운이 좋으면 소울메이트를 만날 수도 있다. 다만 하나의 책하고만 우정을 나누지 않아도 된다. 내게 있어 책은 수많은 경험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멋진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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