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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Sep 24. 2022

"녹턴"_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집

트레바리 '책은 나의 음악' 선정도서 독후감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식기 마련이다. 둘 사이에 함께 하는 시간을 물에 비유한다면, 물이 점점 고여감에 따라 어지간한 뜨거운 물을 부어서는 전체 물의 온도를 올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래 같이 지내는 사람들일수록 서로 간의 식어가는 마음의 온도를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너무 식어 냉랭해지거나 혹시 얼어붙지 않도록 관계의 미지근한 온도를 지속해서 유지하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은 변한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하나둘 죽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며 삶이 유지되듯, 마음과 서로에 대한 기억, 사랑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며 살아간다. 다만 스스로 변하는 것은 잘 느끼지 못해서, 너의 사랑이 변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 사람은 아직 따스한 온도를 전하는 관계로 존재한다 생각했지만, 그보다 훨씬 멀리 있었다. 그럴 때 좋은 기억을 되살려 식어버린 관계를 다시 데울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음악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집 '녹턴'은 오래된 관계와 음악의 힘에 관한 이야기이다. '크루너'의 토미와 린다, '비가 오나 해가 뜨나'의 찰리와 에밀리, '몰번힐스'의 틸로와 소냐는 같이 보낸 오랜 세월에 식어버린 관계의 냉랭한 온도를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서로 같은 곳에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대화는 계속 어긋나고 있었다. 처음 본 상대에게 지나치게 무례하다고 생각하거나, 서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사귀고 있다 의심한다거나, 같이 겪은 여행의 풍경과 경험을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행히 이들에게는 수단이 있었다. 베네치아의 곤돌라에서 '아이 겟 투 러브 투 이즐리'를 멋지게 기타로 반주해줄 수 있는 야네크가 있었고, 예전에 같이 즐겼던 세라 본의 노래를 같이 들으며 춤을 출 수 있는 레이먼드와, 몰번힐스의 언덕 벤치에서 멋진 자작곡을 연주해주는 싱어송라이터인 내가 있었다. 옛 연인 사이에 우연히 끼어들게 된 세 이방인 주인공이 연주하거나 들려주는 음악은 식어버린 관계를 다시 돌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좋았던 기억을 되살려 돌아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녹턴'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스티브와 '첼리스트'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티보르는 각각 린디 가드너와 엘로이즈 매코맥이라는 특이한 캐릭터를 가진 연상의 여인들과 우연히 만난다. 이들 커플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자신이 연주하는 곡을 사랑하지만 그리 인정받지 못했던 음악가들이 그들을 이해하는 여인들의 인정과 적극적 관심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삶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들 삶을 긍정해주는 음악의 힘이 있었다.


음악은 아무리 넓은 공간이라도 순식간에 가득 채우고, 어떤 이의 시간을 그의 기억 속 찬란했던 순간으로 바로 돌려놓는 힘이 있다. 우리는 기억을 남기기 위해 변하지 않는 숫자, 기호나 사진을 의식적으로 남기지만, 의도하지 않게 만나는 음악은 좋아했던 이와 우연히 다시 마주치는 것만큼이나 극적인 감정을 전달한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 지금 내 기억에 뿌려놓는 이 음악이, 언젠가 삶이 힘든 순간에 나를 다시 돌려 세워줄 힘이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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