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사랑할수록 이별이 금방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훼방이라도 놓으려는 건지, 아니면 이별을 발판으로 성장하라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루이스 웨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심사는 다양했지만 한 번도 그 범주에 사랑은 없었다. 그랬던 그가 에밀리와 사랑에 빠졌다. 행복했지만 뒤이어 빠른 이별이 찾아왔다. 한탄할 수밖에 없다.
스무 살부터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은 사정없이 짓눌러왔다. 모든 동물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고양이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보내는 시간에 피터라는 고양이가 찾아왔다. 루이스의 인생을 바꾼 고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양이 역사를 빛난 친구가 있다면 피터도 당당히 이름을 올려야 한다. 인간들이 우리를 그리면서 좋아하게 만들다니, 인간들의 연예인이 아닌가!
루이스 웨인전을 보고 나서 그를 단순히 평생을 고양이만 그린 사람으로 기억한다면 아쉽다. 그가 고양이 화가인 것은 그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앞서서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상한 사람으로 불리는데 익숙했다. 그는 그림을 그렸지만 사람보다는 동물을 그렸다. 구순구개열을 그의 콤플렉스로 만들어준 건 사람이지 동물은 아니니까. 그가 사랑한 에밀리는 나이가 많고 가정교사라는 이유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결심한 듯이 콧수염을 밀고 그가 그녀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잘생겼다고 답했고, 파도에 휩쓸릴 것 같은 그의 불안을 이해해주었다. 난생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에 이상한 두 사람이 만나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고양이를 기른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지금은 고양이를 기른다고 하면 부러움을 사지만 당시엔 고양이를 좋아하고 기르는 건 인기 있지 않았다. 루이스가 그린 고양이 그림 덕분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고양이를 마음껏 좋아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고양이를 다르게 볼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은 처음 고양이를 귀엽게 보기 시작했다.
영화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속 루이스는 '전기'에 사로잡혀 있다. 오죽하면 제목도 <The Electrical Life of Louis Wein>이다. 권투를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전기'가 제대로 담기지 않는단다. 병든 아내와 헤어져야 할 때에도 친구에게 뜬금없이 전기를 이야기하면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비유적인 표현만도 아닌 게 계속 연구를 했다. 이상해 보일 순 있어도 그 덕분인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삶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을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보람이 있다. 눈만 감아도 선할 정도로 펼쳐지니까. 그는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내는 걸 견딜 수 없었을 뿐이고, 전기는 소중한 찰나의 순간에 그의 마음에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루이스가 평생 고양이를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지극히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 우연찮게 피터를 만나서라고 하자. 아내가 떠나고 나서는 아내를 그리는 마음에 그렸다고 하자. 하지만 그 이후의 수많은 시간 동안 그는 계속 고양이를 그렸다. 어느 순간이라도 고양이를 그리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직업 일러스트레이터라 하더라도 그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이 사랑받고, 그가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전시회의 한 작품의 문구에는' I fell in love with a lovely kitten. That Kitten was myself. 사랑스러운 고양이와 사랑에 빠졌어요. 그 고양이는 나예요.'라고 적혀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됐다. 고양이 그림을 통해 그도 평생 자신이 보지 못했던 방향으로 자신을 보게 됐을 뿐이다. 그가 고양이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은 것처럼, 고양이를 그리면서 루이스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외면받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기대하고 활짝 웃어주었다.
그가 그린 고양이는 사람처럼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책이나 잡지를 읽고, 골프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눈싸움을 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닮은 고양이를 보고 더 친근하게 느꼈겠지만, 루이가 실제 사람들의 모든 면모를 고양이로 그렸다면 암울한 그림도 있었을 것이다. 그림이 담긴 화물선을 바닥에 가라앉도록 전쟁을 하고, 그를 앞에선 치켜세워주면서 저작권 같은 건 챙기라는 식의 중요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그는 따뜻하고 익살맞은 고양이를 계속 그렸지만, 사람들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돈도, 인기도, 마음도 루이스에게는 두려워하던 파도와 비슷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휘몰아쳐놓고 그는 혼자 파도에 잠식당한다. 그가 두려워할 때 구해주는 이는 없고 그의 곁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풍요로워졌지만 믿을 수 없이 황폐해진 것이다.
후반부에 그가 그린 고양이를 이름 붙인 만화경 시리즈. 조현병 단계를 보여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저 루이스의 그림으로 봤다. 고양이 그림이 꼭 고양이와 닮을 필요는 없고, 어떻게 그릴지는 그리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손이 가는 대로, 눈이 보는 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그린 그림을 당사자가 알고서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그를 힘들게 하는 일이 많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가장 귀여웠던 고양이를 소개하자면 사이코닉 고양이. 알록달록한 배경에 털이 복실복실, 눈이 초롱초롱하고 어딘지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전시회를 자주 보지 않지만 루이스 웨인전은 어색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오밀조밀하게 그린 고양이 그림에는 따뜻함이 있었고, 귀퉁이에 적혀있는 글은 절로 웃음을 나게 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건 전시회 장을 찾은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한참을 그림을 보면서 연신 귀엽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루이스가 봤다면 뿌듯해했을까. 영국에서 먼 나라에서도 이렇게 자신의 그림을 보고 있고, 벌써 세상엔 수많은 고양이 집사가 있다.
이상하게 고양이를 볼수록 그림을 그린 루이스 웨인이 떠오른다. 자신은 하나도 그리지 않았는데도 이런 그림을 그린 그 사람이 궁금해지고, 그의 이야기를 생각하게 된다. 그를 안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 그의 그림까지 따라가 보고 나니 그가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리란 예감이 들었기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족 모두를 챙기면서 보냈던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는 그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잘 지낼 수 있도록 힘을 모은 덕분에 그는 고양이를 기르고 풀과 나무, 흙이 있는 곳에서 평생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힘들고 아픈 상황도 많았지만 그게 그를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사랑의 화가가 불리는 이유가 있다면 그가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전혀 이상하거나 틀린 방법이 아니었다. 사람들 역시 그 그림을 통해 그에게 사랑을 돌려주었으니까. 영화 속 그는 에밀리 덕분에 세상이 아름다운 걸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에밀리는 단호하게 세상은 원래 아름다운 게 많다고 말했다. 그가 의도하진 않았을 수도 있지만, 루이스 덕분에 우리도 세상이 가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속 그가 찾아 헤매던 전기는 다른 어디에도 아닌 그의 그림에 있었다. 살아있고,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지다가 때로는 마음이 찡해지는 전기.
-이 리뷰는 ARTinsight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