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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May 06. 2023

사랑의 민낯 1-<팬텀스레드> 아스파라거스와 오믈렛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한 세 가지 질문이 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을까? 노력하며 살고 있나? 마음을 잠깐 돌아볼 틈이 생기면 불쑥 나타나는 녀석들이다. 머릿속에선 제법 많은 입장이 각자 주장을 하기 바쁘다. 


첫 번째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커다란 질문이다. 세상에 태어났으니 뭐라도 보여줘야겠다, 보여주긴 뭘, 하고 싶은 것이나 잘 찾아서 하지,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웬 고민이냐. 확고하게 한 가지만 바라보다간 중요한 것을 놓치진 않을까? 이렇게 살지는 않아야겠다는 소거법도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일단은 나다움을 잃지 않고 싶은데, 나를 지키면서 살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마지막 질문은 하고 싶은 건 많지만 그만한 노력을 하기는 귀찮아하기 때문에 점검하는 질문이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로 잘 살고 싶은 걸 어쩌겠나. 잘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움직이고 다시 잠드는 이 과정마저도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상당히 게을러진 건가 싶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를 깨끗이 닦고, 손톱 발톱, 머리를 다듬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도 하고. 이 모든 게 당연하다고 말하기엔 힘들다. 사람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까.


두 번째 질문은 호기심과 두려움의 영역이다.  나라는 사람이 사랑의 주어나 목적어가 될 수 있을까? 머리로 생각하면 시답지 않은 질문이다. 당연히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건 알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건 1+1이 2라거나 해가 지면 달이 뜨는 것처럼 명백한 섭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리 공평하진 않다. 가득 사랑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뭔가에 푹 빠져 시간과 마음을 쏟는 건 어려워졌다.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날뛰어서 불안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차분하니까 바삭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얄궂게도 아마 이래서 시간이 약이구나 싶었다. 즐거웠던 일도, 괴로웠던 일도 기억 너머로 사라지니까. 



< 팬텀 스레드>와 <헤어질 결심>은 내게 사랑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사랑이 행복하고 즐겁다고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한숨이 나올 정도로 지독한 면이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두 영화의 주연들은 단숨에 생각하기엔 정상은 아닌 커플들이다. 우선 오늘은 팬텀스레드. 왜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냐고 묻는다면? 레이놀즈가 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알마는 그에게 독버섯을 먹인다. 레이놀즈는 그런 알마에게 적응해서 독버섯 오믈렛을 오독오독 씹어 먹고 키스를 한다. 진짜 골 때리고 잘 어울린다.


그들에게도 설레는 시작이 있었다. 레이놀즈와 알마는 처음 식당에 만났을 때부터 서로 마음에 들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눈빛이 오갔다. 알마는 식당에서 주문을 받았을 뿐인데 갑자기 레이놀즈가 저녁을 먹자고 제안할 정도로. 


알마는 그로 인해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됐다. 한 번도 목은 길고 어깨는 넓고 가슴은 작고 조금은 배가 나온 자신의 체형이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옷을 디자인하는 레이놀즈에게 알마의 체형은 너무나도 이상적이었다. 레이놀즈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찾았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흐뭇하고 보기 좋지만 의심이 된다.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 호감을 사랑으로 착각할 수 있으니까. 아니, 얼마나 봤다고! 


그래 얼마나 봤다고. 레이놀즈와 알마는 부딪히기 시작한다. 매일 아침 가장 신경이 곤두서있는 레이놀즈에겐  알마가 빵을 자르고 버터를 바르고 와삭와삭 소리를 내며 먹는 것조차 소음으로 느껴진다. 그날 아침에 따라 디자이너로서 그의 하루가 좌우된다고 할 정도다.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지만 그를 아직 잘 모르는 알마는 당황한다. 그를 위해 소리 내지 않고 아침을 먹긴 하지만, 여전히 그가 유난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와삭와삭 소리가 귀에 거슬리긴 한다. 그가 특히 소리에 예민한 사람인 건 확실하다. 



레이놀즈는 디자이너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색과 체형에 맞는 디자인으로 입는 사람에게도 용기를 주는 옷을 만든다. 직업만족도가 최상일 것 같은 그에게도 달갑지 않은 단골손님이 있다. 돈이 많지만 알콜 중독에 여러 번 결혼하는 바바라. 다시 그녀는 몇 번째일지 알 수 없는 결혼을 준비하고 레이놀즈에게 결혼식에 반드시 참석해 달라고 한다.



바바라의 청록색 드레스는 결혼식에서 그녀가 고주망태가 되면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목선을 우아하게 덮고 있던 옷감을 지저분해진 입가를 닦는 걸 보면서 알마는 레이놀즈 대신 화를 냈다. 바바라에겐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라는 말에 레이놀즈 역시 번뜩 용기를 얻고 바바라의 집에 가서 드레스를 되찾아온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둘 사이는 한층 깊어졌다. 여러 번의 결혼식마다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텐데 레이놀즈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디자이너가 손님의 옷을 되찾으러 갈 수도 있다는 걸.


알마는 레이놀즈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와중에 웨딩드레스를 제작 요청하러 온 벨기에 공주를 보고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젊고 아름답고 높은 신분이기 때문일까? 일부러 공주 앞으로 가서 나는 이 집에 살고 있다며 소개를 하는 걸 보면 꽤 동요한 모양이다. 


'아스파라거스 사태'-소금이냐 버터냐

그녀는 한 발 나아가 그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하려 한다. 알마는 레이놀즈를 위해 서프라이즈로 단둘이 오붓한 저녁에 직접 식사도 만들어서 준비했건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명 ‘아스파라거스 사태’가 벌어진다. 표면적으로 둘이 아스파라거스를 먹는 방식이 차이 때문이었다. 소금만 친 아스파라거스를 좋아하는 레이놀즈에게 알마가 그녀가 좋아하는 버터에 졸인 아스파라거스를 먹이면서 생긴 갈등이었다. 


그놈의 아스파라거스. 그게 대체 뭐 어때서? 아스파라거스를 이렇게 먹든 저렇게 먹든 맛있으면 다행이겠지만, 레이놀즈는 취향이 확고했다. 변명하자면 레이놀즈는 원래 서프라이즈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현재 공주의 웨딩드레스 제작 건으로 머리가 복잡해서 누나와 상의를 하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모든 중요한 행사에 그가 그녀의 드레스를 만들었고, 게다가 웨딩드레스이니 더 고민이 커진 것이다. 이 와중에 누나는 이 뜬금없는 저녁식사를 위해 집을 비웠고 버터에 졸인 아스파라거스는 역시나 기름졌다.


불행히도 레이놀즈는 날이 섰을 땐 말을 곱게 할 줄 모른다. 그의 기준에선 많이 참은 거긴 하지만 참으려면 끝까지 참았어야 했다. 그러면 알마도 그 정도는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취향이 아닌 아스파라거스를 먹으면서 레이놀즈는 비아냥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이런 내 모습에 놀랄 지경이라며. 이렇게 조용히 먹고 있잖아?


알마는 그가 자신의 방식만 고집하고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상처받았다. 그동안 쌓여있던 감정을 쏟아내면서 그의 의상실 운영방식이 죽어있는 것 같고 모두 게임 같다고 말한다. 그는 알마가 자신을 괴롭히러 온 스파이냐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유치한 대화이지만 서로 마음이 상하고 나니 못하는 말이 없다. 


이미 느껴지는 망조

사태가 깊어진 건 화법의 문제였다. 그냥 오늘이 최적의 날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다 큰 어른들이라도 몸이 안 좋거나 기분이 안 좋으면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 싸움이 터진다. 알잖나, 우리는 어른이 성인군자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걸. 레이놀즈는 ‘웨딩드레스 건으로 머리가 좀 아프다. 식사를 차려준 마음이 고맙고 다만 나는 여전히 아스파라거스는 소금을 친 게 취향이다’ 정도만 하면 됐다. 알마도 ‘그런 상황인지 몰랐다, 오붓한 시간은 다음에 다시 하자고, 취향이 아닌데도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고 했을 것이다. 물론 알마도 이날 저녁과 관계없는 레이놀즈의 의상실 운영방식을 운운했으니 다른 날에 얘기하는 게 좋았을 주제였다. 이래저래 꼬이려고 드니 꼬인다.


레이놀즈에겐 알마 전에도 뮤즈 역할을 한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모두 레이놀즈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누나는 그녀들을 그 집에서 떠나보냈다. 하지만 다툰 이후 투명 인간처럼 모른 체하며 지내면서도 레이놀즈는 알마를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다. 


그는 알고 있을까? 알마가 이 집이 죽어있다고 한 이유를 말이다. 이 집이 소리에 워낙 민감한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일하는 모두도 말없이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기 때문이며, 그의 의상 역시 유행을 따르지 않아 변화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덩그러니 친구도 없이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독버섯을 먹이라는 용도의 책은 아니었는데

그러나 우리의 알마는 참지 않고 지지 않는다. 그녀도 그녀대로 많은 생각을 했을 터. 그가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게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는지 독버섯을 가루 내어 그의 차에 탄다. 바쁘게 준비하던 일이 끝나면 며칠만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아이처럼 순하게 쉬다가 다시 날카로운 상태로 돌아간다. 그런 휴식이 그에게 필요한 것이다. 차를 다른 사람이 마실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아침마다 그가 따로 주전자를 쓰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래서 잘 아는 사람이 때로 무섭다. 


공주의 웨딩드레스가 완성되어 살펴보던 차에 독버섯의 기운으로 그는 쓰러지고 만다. 드레스는 망가져서 밤을 새워 작업을 해야 했고, 그가 끔찍하게 앓는 시간 동안 알마는 곁에서 간호한다. 이렇게 떳떳하게 병 주고 약 주는 모습이라니! 생각해 보면 건강하지만 바빠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것보다 조금 아프고 힘들어하면서 나에게 기대는 모습에 더 만족하는 이상한 심리가 있긴 하다. 내가 없으면 안 되겠지? 나만 이렇게 당신의 약한 모습을 알겠지? 약해진 상태로 나에게 의존하는 걸 보는 게 좋은 요상한 마음. 


드레스를 수선하면서 보니 레이놀즈는 드레스 밑단에 ‘나는 저주받지 않았다’라는 메모를 넣어두었다. 처음 알마와 만났을 때도 나온 얘기지만 웨딩드레스를 만들면 결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말이 그에겐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강한 사람이고 강해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그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이이고, 결혼할 수 없는 저주에 빠져있는 게 아닌지 두려워한다. 알마는 처음부터 그가 강한 척하려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부정했지만 그의 내면을 그녀는 알아차렸다.


몸이 아파도 의사의 진료는 완고하게 거부하던 그는 알마의 간호로 다행히 쾌유했다. 늘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환영이 보이는 와중에 알마를 보면서 그녀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 역시 늘 건강하게 일만 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레이놀즈는 몸이 낫자마자 그녀에게 청혼한다. 결혼해 주겠냐는 물음을 세 번이나 받고 나서야 알마는 승낙한다. 진심인지 알고 싶었던 걸까? 하기야 둘의 냉전이 워낙 길었어야지.



웨딩드레스를 만들면 결혼을 못 하는 저주

결혼하지 못할 운명에 대한 걱정은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걱정은 결혼하고 나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모습이었다. 신혼여행부터 그는 조금씩 후회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칼로 빵을 자르고 버터를 바르고 먹는 과정이 이미 그에겐 너무 소란스럽다. 그보다 나이가 어린 그녀가 비슷한 연배의 다른 남자와 이야기하는 걸 보고 기분이 나쁘지만 솔직하게 말하진 못한다. 알마는 그에 비해 철부지처럼 어리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파티를 즐기고 싶은 알마를 혼자 보내고, 그는 전혀 일에 손에 잡히지 않아서 시끄러운 파티에 가서 그녀를 데리고 온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저게 사랑인 것 아닌가 싶었다. 그녀가 신경 쓰여서 작업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선 그녀를 찾아 헤매고, 이윽고 그녀를 찾아서 말없이 노려보는 그의 모습이. 그녀 역시 나라도 혼자 다녀오겠다고 당당하게 나서서 즐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를 피해서 어딘가로 숨은 걸 보면 한편으론 그가 와주기를 기다리느라 완벽하게 즐기진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에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게 거짓말일까.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한다면 그건 위선일지도 모르지만 애당초 모든 걸 표현할 수는 있나. 내 방식에 상대가 맞추지 않는 게 거슬리는 건 아닐까. 장점과 단점은 같은 것인 경우가 많다. 레이놀즈는 섬세한 만큼 날카롭고 계획적이고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알마는 느긋하고 털털한 만큼 덜렁거리기도 하고 즉흥적이고 활동적인 걸 좋아한다. 


정말 인생 최대의 실수?

알마가 그런 사람이란 걸 그가 모르곤 있었던 것 아니다. 그럼에도 레이놀즈는 누나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처음엔 단골손님이 다른 곳에서 옷을 맞추는 게 화가 난다고, 그리고 알마와의 결혼이 엄청난 실수라고. 그녀는 여기에 맞지 않고 나를 망치고 있다고. 


재밌는 건 누나 시릴의 반응이다. 그래서? 귀 아프니까 그만 징징대라는 것이었다. 늘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주던 누나 역시 사실은 레이놀즈를 참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은 유일한 가족이니 맞춰준 걸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결혼도 했겠다, 그런 이야기는 더 이상 누나와 동생이 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제는 새로운 가족으로, 아내와 풀어가야 한다고 선을 그어주는 느낌이다. 어,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기억할 건 나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 역시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 그들도 나를 많이 참아주고 있다. 나 역시 그들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그가 하는 투정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일에 집중할 수가 없으니까, 그녀가 신경 쓰이니까 자신도 없어지고, 그의 커리어에선 실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매일 밤이나 새벽에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그가 새로운 옷을 구상할 수 있도록 수많은 옷을 입었던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불안한 것이다. 현재까지의 생활이 그녀라는 존재 하나로 인해 이렇게나 흔들리고 있다는 게. 



오믈렛 먹고 다시 이야기하자

자신과의 결혼이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말을 듣고 나서 알마는 이번에도 당하고만 있진 않는다. 일부러 그가 싫어하는 버터를 잔뜩 넣고 독버섯으로 오믈렛을 만들어준다. 이번에 차이가 있다면 그도 독버섯인 줄 알면서 먹는다는 점이다. 죽고 싶어도 죽진 않을 거라는 여자나 아프기 전에 얼른 키스해 달라는 남자나.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싶었다. 혹시 그를 죽이려나 싶었던 건데 다행히 죽지는 않더라.


독버섯을 먹이고 먹는 것으로 표현해서 그렇지, 사실 레이놀즈가 보여주는 모습은 사랑에 빠진 것뿐이다. 그에겐 사랑이 독일 지도 모른다. 민감했던 그를 둔하고 집중할 수 없게 만들고, 신경 쓰이는 대상이 생기고, 화가 나고 싸우고 후회하게 만든다. 사랑이란 독은 외로움과 나약함, 두려움을 채워주었지만, 자유와 독립, 완벽주의를 내려놓게 했다. 그게 혼자일 때와 둘일 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가 거짓말이라 표현했던 건 함께 하기 위한 배려와 존중이고. 그는 규칙이 있고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답이 없도 때로는 지고 마는 관계 속에 있다. 


희망 사항 혹은 미래의 한 장면

비틀린 사이코 커플처럼 보이던 레이놀즈와 알마는 사랑에 적응하고 성장하는 커플로 보이기 시작했다. 알마는 여전히 그와 풍선이 잔뜩 있는 축제에서 춤을 추거나,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함께 산책하는 미래를 꿈꾼다. 실제로 그게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축제도, 아이도 그리 좋아할 것 같지 않으니까. 그의 나이가 되면 그녀 역시 비로소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둘에겐 세대 차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녀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이유는 충분하다. 레이놀즈가 깊은 상처를 줄 때마다 그녀는 계속 사랑을 주고 기다렸다. 그뿐인가. 그가 말하지 않은 깊은 고민을 그녀는 해소해 주었다. 


그녀가 할 일은 명확했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가끔은 그를 약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강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인지 그는 이제 그녀의 무릎에 누워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그는 사랑을 해서 아주 많이 달라지거나 변하진 않았다. 여전히 아스파라거스는 소금 친 걸 좋아하고, 아침마다 조용히 식사를 즐기고, 유행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옷을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 그저 전보단 의사에게 진료를 잘 받게 됐고 때로 아이가 엄마한테 하는 것처럼 편하게 기댈 존재가 생겼을 뿐. 


사랑은 게임이 아니니 승자는 없다. 기다림과 사랑이 한 사람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차이를 만드는  팬텀스레드라는 게 결론이다. 그 기다림은 때로 힘들더라도 버티는 것이고 사랑은 조금 고통스럽지만 낫기는 한다. 여러모로 이색적인 표현방식이었지만. 알마보다는 레이놀즈와 동질감을 느꼈기에 알마같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겠다.


먹음직스러운(?) 독버섯 오믈렛

다만 사랑하는 이가 너무나 매섭게 상처를 준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독버섯 오믈렛 장면을 떠올리는 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내가 당신에게 오믈렛을 한 입, 때로는 당신이 내게 오믈렛을 한 입. 이렇게 사이좋게 오믈렛을 나눠먹는다고 생각하면 속상한 마음도 풀리고 화도 덜 나지 않을까. 남은 건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독처럼 서서히 스며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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