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가족 구성은 집의 분위기는 물론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세 자매에겐 남매나 형제와 또 다르다. 투닥거릴 수도, 데면데면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가깝게 지내게 될 조합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나 역시 세 자매 중 하나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브론테'에 나온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가의 세 자매는 모두 글을 사랑하는 작가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같은 주제로 서로 다른 글을 쓰는 걸 보는 게 흐뭇하다. 그러나 이들에게 글은 취미도 아니고, 그들의 정체성이자 업이다. 동종업계라면 의견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브론테의 세 자매를 관통하는 큰 갈등은 작가로서 그들의 개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샬럿은 해피엔딩을, 에밀리는 비극을 넘어선 파국을, 앤은 일상을 현실적으로 다루는 것을 좋아한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고 글을 쓰는 세 자매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는 건 다행히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이 이들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나. 진짜 상처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서 온다. 대체로 샬럿과 에밀리가 의견이 첨예하게 달랐다. 책을 내서 글로 돈을 버는 것, 소설의 전개나 결말에 대해서 가열차게 싸우고 있으면 막내 앤이 중재를 했다. 서로 쑥스럽지 않게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지낼 수 있도록. 세 명이 있어서 균형이 맞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예언 같은 편지가 온 뒤로 균형은 깨지기 시작했다. 편지는 샬럿을 오만하다고 했고, 에밀리에겐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했고, 앤은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굳이 오만하다고 할 때 샬럿이 미래에서 보낸 편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오만하다고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기 자신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이 세 명이란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편지를 통해 확신을 받은 에밀리는 열심히 글을 쓰면서 약했던 건강이 악화됐다. 그간 책을 내고 글을 쓰는 것에 고민하고 주저함이 많았고, 그걸 극복하고 집필한 '폭풍의 언덕'에 돌아온 건 샬럿의 비판이었다. 지나치게 무섭다고.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나서 샬럿은 세 자매가 머물던 목사관을 먼저 떠나버렸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싶으면 자신을 드러내라고 했지만 세 자매가 이름을 숨기고 낸 각자의 소설에 대한 평은 엇갈렸다. 제인 에어를 쓴 샬럿에겐 칭찬이 쏟아졌고,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는 혹평이 쏟아졌고, 앤의 글에는 지루하다며 무관심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선 나를 드러내야 한다고 했는데, 드러낸다고 인정을 꼭 받을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그들이 처음 낸 시집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은 권수가 팔렸고, 소설은 많이 팔렸지만 세 자매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샬럿은 칭찬을 받았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독자라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중 그녀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긴가민가 했지만 역시 미래의 샬럿이 편지를 보낸 주인공이었다. 오히려 그보다 의아했던 건 그 이후였다. 샬럿은 혼자 남아 몸부림치면서 좌절하고, 자책한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게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에밀리가 세상을 떠났고, 오래되지 않아 앤도 세상을 떠났다. 동생들을 떠나 다른 곳에서 머물러서? 이렇게 금방 세상을 떠날지 몰랐기 때문에?
브론테가 살아 숨 쉬던 시절엔 평균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다. 사는 곳은 거리가 멀어지긴 했지만 동생들이 언니를 원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이 모든 걸 예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녀가 이렇게 무너져 내려야만 했을까? 그녀가 다시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도 계속 글과 함께 했다. 그리고 그리워하던 에밀리와 앤을 다시 만나게 됐다.
공연을 보고 나서 한편으로는 샬럿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보면서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의 문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뼈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첫째라서, 언니라서, 글로 돈을 벌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동생들과 나누며 지내고 싶었을 텐데, 동생이 아픈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더 챙기지 못한 게 마음이 쓰였을 것이다. 첫째는 그런 마음을 안고 살더라. 그런 것까지 걱정하나 싶게도. 우리 언니도 내 걱정을 하곤 했다. 내가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언니가 잘 챙겨주지 못할 것 같다고. 언니는 이제 언니의 가족이 있으니까. 별 걱정을 다 한다 싶었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은 하루가 다르게 늙고 아프고 병이 들어간다. 그걸 조금 느리게 할 순 있지만 때론 지켜봐야만 한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이별은 막을 수 없고 때로 혼자 남겨지는 건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언니 역시 그런 기분을 미리 느껴봤을지도 모른다.
에밀리는 몸이 약했지만 마음은 가장 튼튼한 사람이었기에 걱정이 되진 않았다. 단 한 마디의 문장으로 확신을 얻어서 끝까지 글을 마무리한 모습에는 누구보다 강한 열정이 있었다. 어릴 적 읽은 '폭풍의 언덕'이 가물가물해서 다시 보고 싶어지기도 했고, 파국을 좋아하는 게 전혀 문제 될 것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막내인 앤이 가장 마음에 쓰였다. 주로 앤은 샬럿과 에밀리 사이에서 조율을 하는 존재였다. 눈치를 보고 애늙은이 같은 구석도 있다. 막내면 어리광을 피우고 많은 사랑을 받을 거라고만 생각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가장 읽고 싶었던 글은 앤의 글이었다. 가장 의견을 알 수 없었던 것도,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느라 고심하느라 시간이 두 사람보다 더 필요했던 것도 그녀이기 때문이다.
기타와 첼로, 드럼이 어우러진 넘버가 기억에 남았다. 마침 공연을 본 자리가 기타와 드럼이 잘 보이는 자리여서 연주자분들의 표정을 함께 볼 수 있었다. 폭풍의 언덕을 쓰던 길목, 세 자매 사이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보여줄 때마다 빛이 났다.
세 명의 브론테를 통해 느낀 건 남다른 교훈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사랑이나 인정을 돌려주지 않아도, 그래도 여전히 그걸 안고 나아간다. 우리 각자의 개성과 가치관이 다르더라도 가족으로서 아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뼈아픈 후회를 하지 않도록 있을 때 최선을 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은 시간에 맡기자는 것. 가능하다면 이별의 준비를 해두는 것도 좋겠다. 그래야 소중함이 옅어지지 않으니까.
브론테와는 다르게 다행히 언니들과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일로 부딪힐 일은 없겠다. 둘은 길이 비슷해서 서로 논의를 하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막내는 조금 멀리서 지켜보는 것도 익숙하고 좋다. 글을 함께 써 내려갈 언니는 없지만 우리는 선거 즈음에 곱창에 청하를 같이 기울이기로 했다. 오고 가는 술잔에 대화를 써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이 리뷰는 ARTinsight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