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가는 날 아침이다. (운동이라고 쓰고 치료라고 읽는다) 보통은 운동을 가기 바로 전에 샤워를 하지만 오늘은 왠지 루틴을 바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씻고 나서 영어 공부를 하고 점심을 먹고 운동하러 가면 딱 좋겠어!라고 헛된 꿈을 꾸었다.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몸을 씻고 바디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아침마다 해야 한다면 나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출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바랐던 근래 나의 어리석음을 한탄한다.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잖아. 근데 뭘 하겠다는 건데?
머리를 다 말리고선 내가 향한 곳은 책상 앞이 아니라 침대였다. 몸에 힘이 없어 누워야만 했다. 대체 체력이라는 건 언제쯤 생기는 걸까? 그런 게 조금 생겼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전보단 조금 나아졌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더 많이 걷고 가끔 뛰기도 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되어 움직이길 포기하고 집안에 들어앉으니 나의 체력은 급격히 하강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겨울에도 모자 쓰고 귀마개 하고 장갑 끼고 산책을 하는 건가 보다. 나는, 아픈 몸으로 한 두해 살아본 것도 아닌 나는, 대체 무슨 여유가 그렇게 넘쳐서 조금만 추워도 귀찮고 싫다고 문밖에도 안 나가는 걸까.
운동이라 부르지만 치료에 가까운 필라테스를 하러 가서는 우둑 우두득 치료를 받고 잔소리를 가득 듣고 왔다.
‘저는 **님 안 아프게 해 드리는 거예요. 유지하는 건 **님 몫이에요.’
안 아프게는 만들어주겠지. 습관으로 만드는 건 내 몫이다. 목을 집어넣는 것, 어깨를 내리는 것을 습관으로 만드는 것. 근데 그게 가능할까? 거의 평생을 가져온 버릇을 새로운 습관으로 덮을 수 있을까. ‘노력 여하에 따라 기간이 달라지겠죠.’ 맞는 말을 듣고 나오면 항상 왠지 모르게 힘이 빠진다. 내가 해야 할 것이 많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 곳 하나 편히 앉을 곳이 없었다. 어떻게 앉아도 바르지 않은 자세 같았다. 나는 조금 편안하게 앉고 싶은데 그건 모두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자세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불편한 마음으로 의자에 어정쩡하게 앉아 있자 바깥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날씨가 뛰어놀 수 있을 만큼 그리 춥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산책을 나갈 수 있는 에너지는 없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매번 노력하길 실패하는 내가 싫어졌다.
내가 언제 다시 수영을 할 수 있게 되느냐고 물어보는 것조차 포기했다. 봄이 되면 거짓말처럼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랐지만, 내가 아무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체력이 좋아지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내가 집 밖을 나가고 내가 다리를 움직이고 내가 걸어야 한다. 내가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샤워로 아침을 시작하는 게 더 이상 힘들지 않고 상쾌하다고 여겨질 때서야 나는 수영복 입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수영복도 입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센터에서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아프지 않도록 몸을 이리저리 조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센터를 벗어나고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 내가 쓰던 대로 몸을 쓰기 시작하면, 어떤 행동들은 통증의 원인이 되고 저녁이 되어선 꼭 통증을 유발한다. 가장 심했던 때보단 많이 나아졌다는 것을 알지만 나빠지는 건 항상 기분이 좋지 않다.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버티는 건 힘들고, 그게 결국 내가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라는 말을 듣게 되면 나는 힘이 빠진다. 정답은 이미 나와있고 내가 부단히 노력해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만 남은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운동을 그만둘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사람들의 일상이 부러웠다.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쇼핑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운동을 하고 식단조절을 하는. 그리고 나를 바라보니 일상적인 일상도 불가능한 환자가 덩그러니 있었다.
건강하기만 하면 아무 걱정이 없겠지.
간절하게 건강해지고 싶은 날이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