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7970 섬유근육통
개학을 하고 나자 오히려 불안한 마음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원래 시작하기 전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 하지만 2월부터 심해진 통증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등과 어깨, 뒷목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학교에선 연신 쿨링젤을 바르거나 손톱으로 목을 꼬집고 누르며 통증을 참아보려 했다. 집에 돌아오면 목과 쇄골에 빨간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첫 주 목요일엔 대부분의 학교가 그러하듯 새 학기 환영회식이 있었다. 그날 회식장소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이미 학교에서의 긴장과 피로, 통증으로 지친 나에게 모르는 곳으로 가는 40분의 운전은 꽤 고단한 일이었다. 진입하는 길을 많이 헤맸고, 도착해서는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 몇 바퀴를 돌았다. 통증과 경직감은 더 심해졌고 뇌에 피가 안 통하는 듯한 익숙한 탈진감을 느꼈다. 터덜터덜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는데 내가 늦어서인지 환영회는 이미 시작된 뒤였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절인 배추처럼 기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모두를 환영하는 생기 넘치는 그 분위기와 너무 아픈 내가 서글프게 대조되어 순간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나는 너무 아프고, 사람들은 너무 밝아서 눈물이 났다. 그렇게까지 울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나도 놀랄 만큼) 정말 쉼 없이 울었고,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 먹는 동안 물 한잔만 마시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서러움과 그날의 긴장, 지침, 내가 아프다는 사실 자체, 일 년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 눈물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그날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좀 데려가 달라고 했다. 다음 날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내가 하루를 참으면 또 하루를 살 수 있지만 아픈 하루를 버텨 오는 것은 또 다른 아픈 날일 뿐이었다. 통증과 사투하여 겨우 버텨낸 오늘이,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내일모레도 계속되는 것, 그래서 결국 나의 날들은 아픈 날과 더 아픈 날들로만 가득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여보, 내가 이렇게 하루를 버텨. 근데 내일 또 아파.
그럼 아픈 날들만 쌓이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
어느 날 퇴근 후 슬픈 눈빛으로 남편에게 말했다.
살면 살 수야 있었을 것이다. 그냥 혼자 아프고 홀로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온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밖에선 웃다가 일과가 끝나고 차에 탈 때야 비로소 풀썩 주저앉으면서. 아침마다 굳은 몸을 겨우 일으키고 점심때쯤이면 아찔함을 느끼며 동료 선생님의 농담에 힘겹게 웃어 보이거나 그마저도 못하면서. 그렇게 살려면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이미 통증을 참으며 일을 해 본 나는, 1년을 했으니 또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아서 배로 두려웠고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게다가 통증은 작년보다 악화되었고 이번엔 담임까지 맡았으니 작년보다 더 고통스러운 날들일 것이 분명했다.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었다.
그즈음 나는 출근할 때 콜드플레이의 fix you를 자주 들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해내지 못할 때 When you try your best but you don’t succeed’ 부분에선 항상 울게 되고야 말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날들이었다.
19.03.06. 일기
아침에 샤워를 하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려는데 몸이 목각 같다. 이대로 굳어버리는 건 아닐까. 모든 게 너무 힘들어서 금세 지친다. 통증과 싸우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아침에 출근하며 콜드플레이의 픽스유를 들었다. 열심히 노력하는데 왜 난 나아지지 않는 걸까. 눈물이 났다.
내가 내 일을 좋아하게 되기까지 십여 년이 걸렸다.
나는 휴직을 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미 새 학기가 시작되어버렸고, 새 학기를 위한 기간제 교사 채용은 2월 중순에 모두 마무리가 되니 그것이 얼마나 파장이 큰 결정인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담임. 고등학교, 담임, 생활기록부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것이 중간에 교체되는 일은 무엇보다 아이들을 위해 없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엔 한 학기는 버텨보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기간의 단위는 모두 학교의 학사일정에 따른 것이었다. 아이들과 학교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며칠 후엔 ‘중간고사 끝날 때 까지는 버텨볼까’로 생각이 바뀌고, 그다음엔 ‘그래도 1과 끝날 때까지(진도를 맞추기 위해)’, 그다음 날엔 ‘3월까지’로, 통증에 온몸을 얻어맞은 듯 몸을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엔 어차피 그만 할 거라면 그저 그런 기간은 다 부질없으며 하루라도 빨리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럴수록 빨리 떠나야 했다. 나 대신 누군가, 반 아이들을 맡아 더 건강한 몸으로 온전히 한 학기를 함께 하며 ‘한 사람의 몫’을 할 선생님이 필요했다. 반 아이들이 좋았고, 수업도 수월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고 무너질 수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닌 자리를 지켜줄 선생님이었다. 그때의 나로선 어서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최선이며 내 할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늦어버렸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하루라도 일찍 말해서 얼른 후임 선생님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3월 12일, 새 학기의 둘째 주 화요일이었다.
휴직을 마음먹은 그다음 날 아침, 과호흡 증상이 나타났다. 내가 쉬고 싶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단서의 산과 학교의 산을 두 번 넘어야 했기에 그 긴장과 불안이 과호흡으로 나타났던 듯했다. 두 시간쯤 누워 진정시킨 후 내가 가장 신뢰하는 의사 두 명 중 한 명인 유 원장님에게 갔다.
아니,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그는 시계를 잠깐 보고는 약간 놀란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많이 놀라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후에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못하겠다고, 버티고, 울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더 이상은 도저히 안될 것 같다고 나의 설움을 쏟아냈다.
내가 휴직을 하고 싶다고 하자 유 원장님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통증 관리를 하며 쉬어가는 것은 무조건 좋다고 하셨다. 그는 내가 일을 쉬겠다는 것에 대해 언제나 좋다고 하신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따뜻하고 다정하게, 하지만 또렷하게. 쉴 수 있다면 일은 쉬는 편이 훨씬 낫다고 딱 잘라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러게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수많은 일개미들은 왜 그 사실을 알지 못할까요.
유 원장님은 처음부터 일 년을 권하셨다. 그 기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 일단 6개월만 쉬겠다고 한 것은 나였다. 일전에 6개월을 휴직했을 때 그것이 지루하다며 불안해했던 경험이 있었고, 1년을 휴직하는 것은 마치 1년 동안이나 낫지 않고 계속 통증에 시달려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아지고 싶었고,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쭉 아프고 싶지 않았다. 방법을 모르기에 나을 자신은 없었지만 낫고 싶다는 바람만은 간절했다.
다섯 달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 사이 체력도 보강하고 나에게 맞는 통증관리법도 찾은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 2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싶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정을 듬뿍 주었던 반 아이들이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밴드부를 마무리해야 했다. 몇 년간 부대껴오던 3학년 밴드부 아이들이 곧 졸업을 하는데, 내가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12월에 있을 그들의 마지막 무대를 멋지게 준비해주고 싶었다. 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한껏 불어넣었던 밴드부였으니, 이번엔 나도 노래를 한곡 불러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나는 정말로 2학기엔 꼭 돌아갈 생각이었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를 들고 곧장 학교로 갔다. 조금 떨렸지만 내 손엔 진단서가 있었고, 결단을 내리고 나니 마음은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결연했다. 교장실에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나까지 세 명이 둘러앉았다. 진단서를 내밀었고, 일순간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작년부터 온몸 여러 부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이 있고 저림이나 작열감 같은 다른 증상도 동반된다는 것을, 그것을 진단서에 적힌 병명인 섬유근육통(섬유근통)이라고 부른다고 말씀드렸다. 아마 두 분 다 처음 들어보시는 것 같았다.
- 불치병인가요.
- 아직 치료약이 없어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 그럼 휴직하면 치료는 어떻게 해요?
- 쉬면서 오빠가 있는 병원도 가보고, 해볼 수 있는 치료법은 다 시도해보고 재활운동도 하려고 합니다.
- 임쌤 아픈 것이 우선 가장 먼저 나아야 하고, 그런데 지금 학기가 시작돼서 기간제 선생님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요. 담임이 바뀐다는 게 문제가 아주 커요. 학교의 사정이라는 것도 있어요.
학교의 사정. 나를 가장 머뭇거리게 한 것이 바로 그 학교의 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음을 설명했다. 서로의 의중은 모두 이해했지만 대화는 무거웠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학기는 시작되었고 나는 고2 담임이었다. 학교가 어렵죠, 그런데 임쌤도 어렵죠, 그러게요, 이런 얘기를 하다 수업 종이 쳐서 대화는 끝이 났다.
휴직하는 과정은 예상대로 순탄치 않았다. 이미 새 학기가 시작돼버려 기간제 선생님을 구하는 것이 어려웠다. 여러 번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지만 그저 누군가가 지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모집기간 마지막 날 찾아와 준 고마운 선생님 덕분에 나는 3월 마지막 주부터 휴직을 할 수 있었다. 업무 인수인계를 하던 날, 어리고 여린 눈망울이 맑던 선생님은 연신 불안해하시며 ‘쌤 돌아오시는 거죠?’라고 물었고, 나는 ‘네, 9월에 뵐게요.’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노트북 스탠드나 키보드, 학용품도 모두 그대로 둔 채로.
하지만 나는 6개월 후에도, 또다시 6개월이 지난 1년 후에도 돌아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