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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인분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통증 환자의 직장 버티기

by 물고기

2018년을 버텨낸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내가 그 1년 동안 학교 일을 중단하지 않고 끝마친 것도, 내가 견뎌낼 수 있도록 외부 상황이 적절하게 세팅된 것도 모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비담임인 동시에 업무가 거의 없는 자리. 나의 교직 생활에서 그런 자리를 다시 맡게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심지어 결혼도 했다. 세 시간 이상 외출도 불가능하고, 몸 컨디션이 어떻게 될지 몰라 약속을 잡는 것도 어려웠는데, 결혼이라니. 2018년은 정말 행운이 가득한 해였다. 하지만 내가 운수가 좋았다는 것도, 지나고 나서야 겨우 더듬어 볼 뿐이다. 나는 그저 매일매일 최대치의 나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땐 정말 운이 좋았다. 한 학년만 가르쳤고, 수업시수도 이전 해보다 줄었다. 업무강도가 낮은 일을 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담임을 맡지 않게 되었다. 업무량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과 감정적으로 얽힐 일이 줄어든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최소화되는 꿈의 시나리오였다. 담임이 아니라면 높은 강도의 업무를 맡게 되는데 학교 측의 배려로 업무도 거의 없는 한직(閑職)이 주어졌다. 그때 만난 학생들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수업에 호의적이었다. 나와 아주 잘 맞는 아이들 몇몇도 그 해에 만나 지금까지 연락하고 있다. 밴드부도 다시 맡게 되어 학교생활의 활력소가 생겼다.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은 그보다 좋을 수 없었지만 그것들이 결국 내가 아파서 만들어진 상황이라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파서 편한 자리를 맡는 것보다는 그저 아프지 않고 남들 하는 만큼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일 인분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랬다면 그런 자리를 만들어내느라 다른 선생님들에게 민폐를 끼칠 일도, 학교생활을 버텨내며 신세를 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2월의 업무분장 시기부터 12월까지 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일 인분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교직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그 한직이, 그때의 내 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이었다. 수업이 아닌 다른 시간엔 말을 줄여 에너지를 아끼고 수업 준비에 전념했다. 그러다가도 통증이 심해서 하루에 한두 시간쯤은 누워야만 했는데, 그럴 때 나는 주로 점심시간을 포기했다. 집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싸와 빠르게 먹은 후 교사휴게실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점심시간의 학교는 매우 시끄러워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요건은 아니었지만, 남은 오후 수업을 위해 무조건 쉬어야만 했다. 눕지 않고서는 통증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에너지를 충전하고 일어나 남은 오후 수업을 마무리하고, 7교시나 야간 수업이 없으면 한 시간, 혹은 30분이라도 일찍 퇴근했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가서 쉬어야 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생존을 위한 비상사태에 돌입하여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모두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수업과 수업 준비–에 썼다.


2학기에는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마다 야간수업을 하게 되었다. 같은 과목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하기로 학년 초에 이미 약속한 것이었다. 그때는 당장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일단 2학기로 미룬 것이었지만, 2학기에도 여전히 아플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찌 됐든 해야만 했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수업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거실에 가방을 놓고 그 자리에 그대로 풀썩 드러누워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림 증상은 어차피 날마다 있었지만, 그렇게 내가 가진 체력의 한계치를 초과하여 무리를 하는 날이면 몸에 더 높은 전압의 전기 코드를 꽂아 놓은 듯 사지가 평소보다 심하게 저렸다.


가을날에는 따뜻한 날씨 덕분이었는지 연애의 마법 때문이었는지 통증 강도가 중간쯤이었다. 하지만 날이 추워지면서 통증이 다시 심해지기 시작했다. 결혼식(2018. 12. 22.)이 다가오며 해야 할 것들이 더 늘어났는데 내 몸은 점점 더 삐걱거렸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계속 살지.’라는 생각을 그때도 종종 했다. 평생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을 만난 것이 행복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통증이 있는 몸으로 평생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행복과 절망의 감정이 항상 공존했다.


2018년의 일기장


아침에는 종종 과호흡 증상이 나타났다. 눈을 떴을 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몸을 겨우 일으켜 안정제 한 알을 넘기고 침대에 누워 약효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으로 인한 불안 발작, 그로 인해 나타난 과호흡. 그 시기 나의 우울감은 모두 통증 때문이었다.


뭘 하고, 뭘 안 해야 안 아플 수 있을까
그걸 모른 채 일 년이 흘렀다.


통증 때문에 우울했고, 통증 때문에 불안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나아질 수 있는지 모른 채 시간이 흘렀고 그런 내가 우울하거나 불안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통증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 이것을 가지고 계속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것, 오늘도 통증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불안했다. 과호흡증후군이 나타나는 것은 대부분 내가 통증을 버티며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것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였다. 평소보다 해야 할 일이 많은 경우, 좀 더 어려운 일을 앞둔 경우 내 몸은 그 불안감을 끝끝내 과호흡이라는 증상으로 만들어 내보였고 나는 그렇게 자주 숨을 못 쉬는 상태에 놓였다.


아침에 나타난 과호흡 증상은 특히 통증을 견뎌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출근에 대한 부담감과 더해져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었다. 휴직한 이후로 과호흡 증상을 겪은 일은 없다.


당시의 일기장. 악화된 통증에 대한 두려움, 매주 빡빡했던 일정에 대한 부담감
- 과호흡 증후군
호흡 중에 이산화탄소가 과도하게 배출되어 혈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정상 범위 미만으로 낮아지는 질환. 각종 전해질 이상이 동반되어 어지러움, 감각 이상, 손발의 경련, 근육의 힘이 없어지는 증상 등이 나타난다. 심근 허혈이 나타나거나 부정맥이 나타나기도 한다. 알칼리증에 의한 뇌혈관 수축에 의해 어지러움, 시각 이상, 실신, 경련 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출처 : 서울대학교 병원 의학정보]


2018년의 내 근무상황부는 엉망이었다. 아파서 학교에 늦게 가는 일도, 아예 못 가는 날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수업 교체에 응해주신 선생님들께 나는 날이 갈수록 더 죄송해졌고, 12월이 되어서는 정말 면목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학교에 가지 못했던 날들에 나는 내 수업 시간표를 손에 쥐고 내가 들어가지 못 한, 그리고 누군가에겐 갑작스러운 통보였을 수업들을 생각했다. 다음날이면 무거운 마음으로 시간표 교체 파일을 확인하고 선생님들께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지만, 마음의 짐이 쉬이 덜어지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신세를 지고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나는 간절하게 온전한 일 인분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수많은 병조퇴, 병가가 나의 근무상황부를 수놓았지만, 내가 2018년을 중도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많은 이들의 배려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랬기에 나는 내 힘만으로는 절대 온전히 한 사람 분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빨리 인정했어야 했다.


2018학년도를 끝내고 다행히도 살아남은 나는, 2019학년도에는 담임을 하겠노라고 호기롭게 업무분장 희망원에 적어 제출했다.


내가 1년을 버텼다고 해서 또다시 1년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1년을 버텨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정말 다시는 오지 않을 ‘운수 좋은 날’이라 가능했던 것이고, 그 많은 ‘운수 좋은 날’들이 이어져도 결국 설렁탕을 먹지 못한 내가 그냥 보통날엔 인력거 한번 끌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몰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그때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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