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죽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길게 잠들고 싶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by 물고기

2018년 2월 23일 밤, 취침 전 약 12봉을 모두 먹었다. 죽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통증은 잠을 자고 있는 순간이 아니면 매 순간 나를 괴롭혔고, 난 단지 평소보다 많이 길게 자고 싶었을 뿐이었다. 죽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대로 깨지 않게 된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72알의 약을 한 번에 먹는 것은, 그런 각오가 필요했다. 그 통증을 가지고 사느니 그러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당장 통증이 없는 상태이고 싶었다.

약을 먹기 전 약물 과다복용, 위세척 같은 단어를 검색했다. 요샌 약이 좋아서 거의 깨어난다고 했다. 이런 경우에 응급실 비용은 보험처리가 안 된다고도 했다.

그렇구나. 통증에 극도로 민감해진 나는 그런 사실에는 왠지 모르게 둔감해졌다. 세상에 중요할 것이 없어 보였다.


편지를 쓰고 약을 먹었고 잠이 들었다. 약을 많이 먹는 일은 그만큼 물을 많이 마셔야 해서 매우 배가 부르는 일임을 몰랐다. 경험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일이다. (그 누구도 경험하지 않길 간곡히 바란다.)


나는 정확히 24시간 후에 깨어났다. 내가 원하던 대로 길게 잔셈이다.

생각보다 짧긴 했지만 평소보단 길었고, 아무 일도 없이 깨어났다. 그리고 25일 하루는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26일에 다시 통증이 돌아온 것을 보니 다량의 약물이 투입되어 중추신경계가 다시 깨어나는 데 평소보다 긴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 일도 없이 깨어난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나는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 어리석음으로 인한 대가는 몇 달 후에 톡톡히 치르게 된다.)


약을 한꺼번에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유 원장님(나의 오랜 주치의 선생님)에게 크게 혼날 것 같았지만, 내가 약을 다 먹어치워 버렸기 때문에 병원에 가야만 했다. (나는 오랜 불면증이 있다.)


- 아직 약이 남았을 텐데요, 오늘은 무슨 일이십니까.

- 제가 약을 다 먹어서요.

- 네? 그걸 다요?

- 네.

- 왜 그러셨습니까.

- 자면 안 아프니까..

많이 먹고 계속 자서 오랫동안 안 아프고 싶었어요. 한 일주일쯤.


나는 예상대로 혼이 났다. 일주일 치를 먹는다고 일주일을 자는 게 아니라는 말,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거지 무슨 일이 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위험인물이 되어 약을 3일 치만 받아갈 수 있게 되었다. 3일이라니. 병원을 그렇게 자주 오가는 건 귀찮은 일이지만 죄를 지은 자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법이다.


2월의 마지막 날, B대 대학병원 의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하는 주사치료는 하루 정도의 통증 경감을 가져왔지만 큰 차도가 없었고, 약물 치료 또한 종류와 용량을 매번 바꾸어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날은 의사가 마지막 통보를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평소처럼 나를 처치실로 보내지 않고 진료실에서 긴 대화를 나눴다.

- 저희 과에서 할 수 있는 건 이제 다 해본 것 같습니다. 신경과나 정신과로 전원 해서 약 조절을 더 디테일하게 해 보는 건 어떨까요.

- 그러면 제가 이미 다니고 있는 로컬 정신과가 있으니 그곳에서 약 조절을 하는 건 어떨까요? 오랫동안 다녀서 이미 래포형성도 잘 되어 있고요.


- 그러면 그쪽에서 약 조절을 해서 통증도 조절하시는 편이 나으실 것 같습니다. 제가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 아니에요 선생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가 나를 포기했다.

나는 이제 이곳에선 더 이상 갈 병원이 없었다.


개학은 코앞이었고, 그런 몸 상태로 살아 본 것이 처음이니 내가 새 학기를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었다.

봄. 나들이. 공원. 노래. 기타. 꽃. 나무. 하늘. 구름. 맑은 날. 산책. 음악

당시 내 방 벽에 붙여 놓았던 종이들. 그리운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날마다 보았다.

그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리운 것들을 종이에 한 가득 적고는 벽에 붙여놓았다.

그 단어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그리워하며 언젠간 그것들을 다시 보고, 하고,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2018년 2월의 나는 누구보다도 간절히 봄을 기다렸다.

봄이 오면, 날이 따뜻해지면, 근육의 경직도 조금 완화되고, 통증도 조금 나아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봄과 나무와 하늘과 구름. 기타와 음악.



2018년 2월 18일의 일기장.



아래 글은 제가 2018년 2월 23일, 약을 과다 복용하기 전 썼던 편지로 공개 여부를 많이 망설인 글입니다. 관련 트리거가 있다면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저도 이 편지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채 다섯 번도 읽지 않았습니다. 너무 슬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절망적인 감정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글을 쓸 수가 없었고, 통증을 겪으며 바닥을 찍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누군가도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될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다시 이 편지를 꺼냈습니다.

저는 다시는 약물 과다복용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혹시 그것을 시도해봤거나, 시도를 고려해봤다면, 그런 마음을 먹을 정도의 통증을 가지고 있다면, 제가 당신의 마음을 압니다.
당신의 통증을 줄여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2월 23일의 편지 전문


엄마,

내가 오랫동안 수면제를 먹어 오긴 했지만

나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 다른 모든 요인은 다 사라졌어.

나는 통증이 가장 힘들어.

끝이 보이지 않고, 매 순간 매초 어딘가 불편하고, 아프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통증.

‘이 상태로 어떻게 버티지?’ 했던 게 2월 초였어.

오늘이 2월 23일 금요일. 아직까지 효과가 있었던 치료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프고, 팔에 힘이 없어. 팔이 너무 무거워.

집이 엉망이라 미안해. 내가 집 치울 기력이 없어.

오늘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옷을 걸고, 바닥에 있는 걸 치울 힘이 없었어.

엄마,

나는 끊임없이 계속 아픈데 그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 너무 힘들어.

엄마, 난 너무 힘들어.

겨우겨우 하루하루 버텨 왔는데 이 통증이 대체 언제 끝날까.

엄마, 미안해

오빠. 오빠가 의산데 내가 이래서 미안해.

아빠. 미안해.

두 달 정도만 자고 일어나면 어느 곳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프지 않은 상태로 살고 싶어.

유 원장님 죄송해요, 이러라고 주신 약이 아닌데.

원장님 덕분에 크게 무너졌을지도 모를 여러 번의 위기를 넘겼어요.

몇 번의 인생을 더 살았던 거라고 생각할게요.

B대 김 선생님, 엄마랑 오빠한테도 자랑 많이 했어요. 정말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고.

그래도 진료 때는 많이 웃으려고 노력했는데, 해결하기 어려운 환자여서 죄송해요.

쉽게 포기하지 않으셔서 많이 위안이 됐어요.

엄마, 내가 지금까지 해 온 모든 못난 말과 무심한 행동은 잊더라도

이것만은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난 엄마를 사랑해.

엄마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도 혼자서 너무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거 알아.

선생하고 처음부터 엄마 용돈 보낼 걸.

10년이 돼서야 깨달아서 미안해.

내가 가진 모든 건 다 엄마가 가졌으면 좋겠어.

엄마, 기타 비싼 거야. 누구 주지 말고 집에 둬.

엄마, 내 은행 인증서 비밀번호는 ***********

(엄마의 영어 이름과 숫자, 특수문자 조합 – 엄마는 지금도 모르고 있다)


엄마. 난 반년 전부턴 유 원장님과 학교 일이 힘들다 느니,

잠을 잘 못 잔다느니 하는 문제로 얘기하지 않았어.

목이 아픈 게 제일 우울하다고 했어.

요새 걱정거리 하나 없는데 목이 아파서 하고 싶은 걸 못하니까 힘들다고.

난 이제 우울하지 않아. 몸이 아픈 거 말곤.

이제 몸이 아파 집안일도 겨우겨우 해.


난 앞으로도 날마다 하루 종일 이만큼 아프고,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혼자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겠지.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라고 2주 전에 너무 아플 때 생각했는데

지금도 제대로 살고 있는 진 모르겠어.

지금도 제대로 못 버티는 것 같아.

엄마 안녕. 내가 진짜 미안해.

2018.2.23.20:05

오늘 컬링은 이기겠지.



아무래도 다시 깨어날 것 같지만,

모르겠다. 어떻게 살지.

나 이제 선생이 그렇게 괴롭지도 않아.

난 지금 이 통증이, 이 느낌이 내가 눈을 뜨고 깨어 있는 한 계속 이어진다는 게 괴로워.

keyword
이전 04화의학적 이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