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나의 밴드부
통증이 가져온 상실 ①
나는 정말 최소한의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고 최소한의 활동을 했으며 나에게 무리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한 한 모든 스트레스 요인을 차단하고 내가 만든 고요한 평화 속에 살다가도 이따금씩 슬퍼질 때가 있었다.
밴드부 강현이 카톡 프사에 올린 내 결혼식 때의 밴드부 단체 사진을 볼 때. 밴드부에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을 때 . 그건 분명 슬픈 일이었다.
일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밴드부는 사랑했다. 그 만큼의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한 때 교사를 그만두고 음악을 직업으로 삼으려 하기도 했으니까. 이런저런 방황을 하다 학교로 다시 돌아온 나에게 밴드부실은 유일한 숨 쉴 구멍이었다. 특히 2016년에 옮긴 학교는 다소 평화롭지 않은 곳이었고, 나는 매일을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으로 살았다. 보고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많은 것들이 나의 눈과 귀를 통과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온갖 험한 일을 겪어도 텅 빈 밴드부실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곳에서야 비로소 안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열댓 명이 들어서면 꽉 차는 그 작은 공간 안에서 나는 그나마 나 자신일 수 있었다.
페이스북에 동료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공연 소식을 올릴 때 나는 밴드부 소식을 올렸다. 밴드부는, 내가 아직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는 일종의 위로와도 같았다. 밴드부를 처음 맡았던 2016년에는 예산을 여기저기서 끌어와 오래되고 망가진 악기들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악기 스탠드, 연결 케이블까지 모두 새로 샀다. 다시 돌아간 2018년엔 그 장비들과 내가 적은 메모까지 그대로라 마음이 시큰해졌다. 다른 동아리실과 달리 밴드부실은 매일 사람이 드나들었다. 종일 잠만 자는 아이도, 다른 할 일이 많아 바쁜 아이도 그곳에서 노래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항상 음악소리가 들렸고 방과 후에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경우도 흔해 아파서 일찍 가려고 나오던 나도 밴드부에 들러 삼십 분을 더 있다 가곤 했다.(심지어 병조퇴를 달아놓고도)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곳이 그런 공간이라서, 꿈을 꾸는 곳이라서 좋았다. 내 꿈은 종결된 것 같았지만 그곳에선 아이들의 꿈을 맘껏 응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실상 무조건적인 응원보단 오히려 더 혹독하게 음악만으론 먹고 살 수 없는 뮤지션들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이야기임을 알았다. 음악을 취미로만 하겠다는 아이에게는 오히려 잘 생각했다고 하기도, 실용음악과에 가겠다는 아이와는 함께 긴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음악을 꾸준히 하라고 말했다. 어찌 됐든 함께 음악을 꿈꾸던 우리가, 앞으로도 음악을 놓지 않는 결말이길 바랐다.
3월, 휴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담임 학급만큼이나, 아니 감정적으로는 훨씬 더 걸렸던 것이 밴드부였다. 우리는 작년부터 이미 올해를 걱정하고 있었고, 올해가 되어서는 12월의 축제를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3월이 되어서는 한창 신입생 오디션을 진행 중이었고, 앞으로 밴드부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에 대해 날마다 의논하고 있었는데 수장인 내가 갑자기 쏙 빠져나간다고? 생각만 해도 너무 미안했다.
내가 휴직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린 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밴드부 아이들이었다. 학급 아이들에게 미리 말하는 것은 분위기만 어수선하게 할 뿐이라 여러모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밴드부 아이들에게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만큼 내가 이렇게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고 싶었다.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에 대해서는 학교의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 아이들에게만은 말하고 싶었다. 작년 내 결혼식의 청첩장을 준 학생들도 밴드부 아이들이 유일했다. 교장, 교감선생님에게 휴직을 결심한 사실을 알리고 며칠이 지난 3월의 어느 점심시간, 밴드부실에 2, 3학년 밴드부 아이들이 모였다. 평소와 다르게 내가 분위기를 잡아 아이들이 조금 어색해했고, 내가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하자 분위기는 금세 슬퍼졌다. 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아이들이 내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며 걱정하고 안타까워해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괜찮아, 죽는 병 아니야, 아무리 아파도 죽질 않아 참, 이라며 나답게 농담을 시도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노력했다. 아이들이 자기들 걱정은 말라고, 밴드부는 알아서 잘하겠다고 말해주어 안심이 되었다. 나는 2학기엔 꼭 돌아오겠다고, 방법은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건강해져서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니 어느 날 카톡에서 강현의 프로필 사진이 내 결혼식 때 밴드부의 단체사진으로 바뀌어있는 것을 보고 내가 울컥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이 그 사진 속에 담겨있었다. 최소한의 나로서는, 이제 학교에 있지도 못하고 밴드부도 못한다는 것이 한순간에 실감되어 땅굴처럼 서글퍼져 버렸다. 일을 쉬는 것, 좋은 운동 선생님을 만난 것, 사랑하는 남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모두 좋았지만 그렇게 내가 통증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것을 눈앞에 바로 마주하게 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강현에게 카톡을 보내 나는 우는 듯 웃었지만 실제로는 울었다. 많이 울었다.
통증은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통증 자체보다도 통증이 나로 하여금 포기하게 한 것들을 생각하면 그보다 몇 배는 더 절망스러웠다.
이미 오래전에 포기한 장거리 이동, 인간관계, 시간 약속, 여행, 공연을 보는 것, 내가 공연을 하는 것, 음악을 하는 것과 더불어 밴드부가 나의 상실 목록에 추가되었다.
이미 많은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날마다 무언가를 점점 더 상실하게 되는 날들이었다.
질병은 삶의 모든 부분이, 상실조차, 경험할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슬퍼하는 일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소중히 하는 일과도 같아요. 상실감마저 소중히 여길 때 삶 자체를 소중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다시 살기 시작할 거예요.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