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일제문소 Aug 11. 2023

너무나 많은 여름이

입추: 입 닥쳐, 추워지려면 아직 멀었어  

잊을 수 없는 이행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입추, 입 닥쳐. 추워지려면 아직 멀었어. 모두가 같이 망해가는 기후위기 시대에 짧고 간결하고 과격하고 잊을 수 없는 이행시다. 정말 입추 당일까지만 해도 최고기온 35도까지 기온이 치솟더니 오늘은 태풍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25도가 찍히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좀 시원해져서 다행이다'보다는 '아, 이제 진짜 멸망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 여름은 지독하게 뜨거웠..아니 뜨겁다. 게다가 나를 비롯한 지구인들이 이미 저질러놓은 짓이 있으니, 예전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너무 알 것 같아서 이번 여름은 낭창하게 '여름이었다' 감성을 풀어헤치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나니 유유자적 부유하던 지난 두 달의 여름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분명히 경주도 일주일씩이나 다녀오고, 친구 회사에서 일도 하고, 가방도 사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바빴는데 나의 여름은 8월의 성수동이냐 아니냐로 나뉘어버린 듯하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써서 그런가. 왜 이렇게 하나에 집중할 때는 그 이전의 시간들이 통으로 날아가버린 느낌인 건지 모르겠다. 내 나름대로 너무 능구렁이 같지 않게 젊은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리고 안 꺼낸 지 한 8년쯤 된 능청과 오글거림을 다시 장착하고 새로운 회사의 룰을 맞춰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처음엔 마음이 좀 급했다. 내가 경험한 것들 기준으로 부족한 것들만 잔뜩 보여서 안절부절못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방법이 늘 옳은 것도 아니고 이 회사도 자기들만의 방식을 꾸려온 게 있을 텐데 그 부분을 너무 간과했던 것 같다. 사람이 참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내가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 중에 가장 큰 부분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제로투원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그들의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을 하다니. 진짜 사람이 좀 웃긴 것 같다. 다행히 나를 후드려패주는 가족과 친구들 덕분에 4일 만에 정신 차리고 한껏 그들의 룰에 따라보려고 하고 있다.


성급한 판단은 이르지만 건강하고 순수한 조직이다. 이건 뭐 거의 늙은 나의 행동을 개선시키는 역금쪽이 프로젝트에 가깝다. 그리고 그 건강함과 순수함을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하는 노력이 대단하다고 매일 느낀다. 세상에. 아직 이런 젊은이들이 있다니. 회사 합류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내가 악역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될 것 같다고 했는데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장생활을 오래 했으니까 좀 닳고 닳은 느낌은 있겠지 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엄청난 꼰대이자 혁신의 대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역시 나이 든 사람일수록 일은 젊은 사람들이랑 해야 한다. 선배들의 경륜, 경험도 좋은데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럼 이들에게 무엇을 줘야 할까. 그들이 쓸모 있게 여길지는 모르지만 나 또한 줄 수 있는 게 경험뿐이다. 쓸모에 있어 약간 자신 없어하는 이유는 회사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겪어내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한 번도 똑같은 적이 없었다. 다만 내가 그들보다 조금 더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또한 지나간다는 존버의 경험, 우리끼리 좋은 팀이 된다면 더 잘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의 경험, 아니다 싶은 건 빨리 털어버리는 손절의 경험, 나보다 더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대신 물어봐줄 수 있는 관계의 경험 뭐 이런 것들이 아닐까. 마주하는 상황은 달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솔루션에도 어느 정도 패턴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겪어보지 않은 시간들이 띵동-하고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먼저 창밖을 힐끗 내다보고 준비를 해두는 탐지견...정도면 어떨까. 아, 물론 나쁜 놈이면 바로 물어뜯어버릴 사냥개적 면모도 당연히 준비되어 있다. 좋은 손님이 오면 바로 최고급 의전과 함께 꽃길 런웨이도 가능하다. 자꾸 빠져나갈 구멍 만드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그래도 이 사람들과 브랜드, 제품에 꽤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자꾸 나를 되돌아본다는 건, 나도 본능적으로 배울 점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거다. 좋은 팀이 주는 맛도 알고 만들어본 적도 있으니까 이번에도 또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일을 더 배우고 싶은데 사수가 없다고, 나는 왜 중요한 프로젝트 안 시켜주냐고, 선배들이 일하는 방식이 이상하고 비합리적이라고 투덜대던 그 하찮았던 내가 어느덧 구시대의 아이콘스러운 사람이 되어있다. 그렇게 섭섭하지도 않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게 된다. 나에게도 너무나 많은 여름이 지나갔고,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 시간들을 통해 모난 부분이 둥글어졌다는 맥락보다는 그저 잘 겪었고 별 탈 없이 다 지나갔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아직 소설을 읽지도 않아서 <너무나 많은 여름이>라는 제목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만큼이나 마음에 깊이 남는다. 얼른 책 사서 봐야지.


너무나 많은 여름이.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6월의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