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남미새의 고백
내가 이 글을 생각한지는 한참 되었다는 걸 굳이 생색내고 싶어서 캡쳐를 떠봤어. 메모장만 한참 들여다보다 덮은 게 여러 번인데 막상 아무것도 준비를 못했다고 너에게 자수를 하고 나니까 글이 써진다. 생일 축하해. 출장을 가든 여행을 가든 자그마한 엽서 하나는 꼭 써주는 너에게 러시아 소설 같은 대서사시로 보답하고 싶었는데 부담스러울까봐 작고 귀엽게 내 브런치로 준비해봤어.
아, 사실 너의 생일에 맞춰 글을 쓰려고 이거까진 준비했었어. 델리스파이스 <고백>의 가사 캡쳐. ‘중2 때까진 늘 첫째줄에’ 이 가사가 자꾸 맴돌더라고(사실 중1이라고 기억함). 어릴 때부터 훤칠했던 너는 중8 때까지 첫째줄일 것만 같은 느낌이었지만…일찌감치 홍대병에 걸리고 델리스파이스를 좋아하던 너는 참 이상하고 멋졌어. 수업시간에 잠을 많이 자는 중3 언니를 둔 것까지도. 나는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장국영을 좋아하고, 디카프리오 엽서 뒤에 편지를 써주던 너는 멋진 취향의 서울사람 같았달까. 아직도 너의 닥터마틴과 곰돌이 가방도 생각나. 그리고 이제 그만한 딸이 있어도 될 나이에 이런 말 하는 거 너무 웃기긴 하지만 전교 1등으로 들어와서 쫄딱 망한 나와 새로운 1등이 된 너, 우리가 같이 봤던 <우리들> 같은 소녀들의 영화를 보면 우리는 되게 대결구도여야 하는데 나는 니가 좋아하는 게 그렇게 또 좋아보이더라? 멋있었어.
우리는 그때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어른스러운 척을 하며 그렇게 소녀스러운 것들을 많이 안한 것 같은데 서랍을 정리하다가 나오는 것들을 보면 그건 그냥 나의 착각이었던 것 같아. 교환일기도 쓰고 뭔놈의 스티커 사진을 그렇게 찍었는지. 남들 하는 건 다 했더라. 그리고 너로 인해 음악도시를 알게 되고 밤마다 라디오를 듣던 나는 성적을 말아먹고…응? 생각해보면 우리가 같은 반을 한 건 1학년 때 딱 한 번인데 이놈의 인연이 질기다면 질긴 게 여기까지 왔다. 그치.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모르고 지낸 세월의 거의 두 배가 되어가고 있어. 부끄럽지만 나는 너를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해. 젊고 체력이 좋은 나머지 인생을 가만히 두질 못했던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실컷 하고 너의 얘기를 많이 못들어준 것 같아. 그래서 웃기게도 너는 25년이 넘어가도 점점 더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나의 개삽질이 약간 KBS 아침드라마라면 너의 개삽질은 SBS 시트콤 같아.
늦은 밤, 신해철의 개똥철학을 들으며 세상 심각한 척하던 우리가 이제는 샤이니 영화를 보며 오열하게 되었지만 나는 그 웃기고 이상한 과정을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서로의 인생에서 꽤 중요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게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져. 너 원래 시간이 깡패인 거 알지? 가족은 내가 못이기니까 일단 빼고, 너에게 내가 짱이고 나에게도 니가 짱이야. 서로가 서로를 더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켜보고 기억할 수 있게 우리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자. 환갑에 볕 좋은 데서 샤넬 트위드 자켓 하나씩 딱 걸치고 화이트와인으로 낮술 거하게 때릴 수 있게 좋은 컨디션 한 번 유지해보는 거야. 아마 내가 죽으면 나의 가장 어린 시절부터 오래 기억해줄 수 있는 친구는 너니까 서로 더 좋은 기억 많이 남길 수 있도록 내 인생 단도리 잘하고 너에게도 더 정성껏 잘할게. 생일 축하해.
그리고 샤이니 콘서트 예매 25일 저녁 8시야. 나 그날 헤드윅 공연 7시 반부터라 지금 큰일났어. 내일 또 얘기해.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