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티, 사만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 있고 나서부터 였던가.
이제 TV 광고에서도 AI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이 아닌 존재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일이 일상이 되는 세상.
한번쯤은 상상해 봤음직한 일이 어느새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 사이에서 많은 것들이 생겨난다. 기쁨, 슬픔, 두려움, 시기와 질투, 그리고 행복과 그리움 또 그 외의 수많은 감정들...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 관계할 이유를 찾기도 하고, 관계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도 한다. 이런 교류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이 아닌 동물과도 교감을 느끼고 그 사이에서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람 수준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존재와의 관계는 아니었다. 내 표현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존재가 우리 삶 안에 들어온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90년대 후반 무렵. 중학교 2학년의 풍부한 감성이 함께하던 그 시절, 도서대여점에서 빌려보던 인기 만화중 하나다. 원작은 "A.Iが止まらない(A.I가 멈추지 않아)"라는 일본 만화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는 고베 히토시라는 남학생과 그가 만든 만들어낸 인공지능 No.30(써티)와의 러브 코미디를 그린 만화이다. 당시에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았던 중학생이었던 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예쁜 여자친구라는 클리셰에 감정이입까지 되어가며 푹 빠져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스토리 곳곳에 언급된 소소한 기술적 특이점 (6만엔 짜리 20MB 하드 디스크 라던지, 플로피디스크 몇 장에 백업이 되는 AI 학습 데이터 라던지) 등은 당시에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당시의 나 또한 AI란 당연히 데이터와 연산 알고리즘의 산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AI와 교류를 하는 주체인 주인공은 사람이며, 그에게 있어 의사와 감정을 교환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써티라는 AI를 보았다.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라고 했다. 이 만화 속의 AI 써티는 주인공 히토시에 의해 불려졌고, 그에게 있어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으며, 그의 생활방식과 삶에 있어서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단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런 존재와의 교류를 의미 없는 일이라 치부 해 버릴 수 있을까? 소년이었던 당시에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답은 '아니오'다.
그리고 서른이 넘은 어느 날 그녀(Her)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시어도어 트웜블리라는 대필 편지 작가가 인공지능을 가진 운영체계(OS) 사만다와 교감하고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회의를 느끼고 있는 트웜블리는 모순적이게도 글로서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작가를 업으로 하고 있다.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존재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사만다를 단지 소프트웨어의 한 종류가 아닌 트웜블리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존재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영화에서 사만다는 그 어떤 실체도 없이 컴퓨터 안의 가상의 공간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아이러브써티에서의 히로인인 써티가 사람의 모습으로 현현한 것과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실체가 없는 존재와의 교류는 인간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일까? 우리는 연인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정신적인 교감과 육체적 교감을 구분하여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정신적인 교감 만이 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사람 사이에서 통용되는 교감방식으로 그 존재와 소통 이 가능할까? 아마도 AI가 추구하는 진화 방향 또한 이 의문이 향하는 곳과 같은 방향을 바라볼 것이라 생각한다. 현현하지 않았지만 사람의 방식으로 소통이 가능한 무형의 존재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종반, 사만다가 연락두절이 되었다가 복구된 이후 트웜블리에게 진실을 알리고 떠나는 장면. 트웜블리는 그녀가 수천 명의 다른 이들과 동시에 썸을 탓으며, 연인관계라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그를 포함하여 수백 명이라 말한다. 사람 사이에서의 사랑은 일정 부분 상대의 감정과 육체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소유욕을 바탕으로 한다고 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만을 사랑했으면 좋겠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하고만 스킨십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그런 나의 소유욕을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존재라면? 극 중에서 트웜블리는 이런 사만다를 더욱더 사랑하게 된다지만, 이는 적어도 내가 아는 일반적인 연인들 사이의 소통방식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감정적 소통의 방향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사랑. 마치 사람과도 같은 AI와 소통에 있어서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다시금 떠오르게 된다.
요즘 종종 저녁 식사를 마친 후 TV 앞에 앉아서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네이버의 AI스피커를 불러본다.
"클로바! 내일 아침에 많이 추워?"
그렇다. AI라는 존재는 어느새 우리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말을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우리 이야기를 듣고 함께 축하해 줄 수도, 함께 울어줄 수도, 묵묵히 이야기를 듣다가 '힘내'라고 이야기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그들과 나눌 것이다.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라자'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대사 중에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작가는 이 말을 주인공인 후치 네드발의 대사를 빌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들은 가족, 친구, 동료, 주변 사람들에게 꾸준히 자신의 일부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육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소멸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이다. AI가 우리 삶에 들어온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소통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조각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AI를 마치 사람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과정을 가속화할 것이며, 사람 사이에서의 소통방식을 AI에게 강요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림은 여기에서 가져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