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없이는 선택지도 없다
가끔 회사를 그만두고 길게는 몇 달 휴식기를 가질 때마다 나를 가장 반대한 것은 엄마였다. 모든 한국 엄마가 그렇겠지만 우리 엄마는 극성스러울 만큼 딸의 인생을 걱정하는 타입이었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인생을 망치는 대표적인 길은 원치 않는 임신과 구직 실패였다. 연일 뉴스에 나오는 형사 사건들과 청년 실업 문제가 딸에게 벌어질까 걱정인데 딸년은 잘 다니던 직장을 자꾸 그만두고 여행이나 다녀오겠다고 하니 엄마는 미칠 노릇이었다. 몇 번의 백수 기간 동안 엄마는 나를 들들 볶기 시작했고 나는 한두 번의 실수 후 늦게나마 방법을 찾았다. 일을 그만두었다는 말을 엄마에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IMF 시기의 가장들처럼 엄마에게 매일 출근했다고 거짓말을 둘러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 많은 거짓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때마다 생각했다. 대체 부모 세대는 왜 인생에서 짧은 휴식기를 갖는 것에 이렇게까지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나는 구직할 때마다 그리 고생한 적이 없다. 엄마도 그걸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번에는, 한 살이라도 나이를 더 먹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직장을 구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 실현될지조차 불확실한 불안으로 왜 나를 옥죄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 회사를 그만두면서 회사 대표가 ‘너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 자신은 삼십 대는 물론이고 오십 대가 된 지금까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휴식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기업을 몇십 년째 다니다가 그만두자마자 자기 사업을 차린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다. 회사를 다닐 때는 매번 나에게 ‘한창 일할 시기에 그렇게 자꾸 몇 년 일하다가 뛰쳐나가서는 안된다’고 퇴사를 말리던 분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분은 아마 타임머신을 타고 삼십대로 돌아가도 지금처럼 똑같이 살 사람이다. 자신이 회사에서 이룬 성취와 사업가로 이룬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어른이 처음으로 이삼십 대와 일을 하면서 이런 삶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머릿속에 떠올려본 것이다. 내 대책 없는 퇴사로 인해.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자신과 다른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것이 삶의 자유도를 나누는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삶을 상상해 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결혼, 구직, 출산 등은 모두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틀이다. 그걸 벗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그게 본인이거나 가족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내 부모는 꼬박꼬박 돈 나오는 회사에서 나를 적당히 인정해주는 데도 대체 무엇을 더 원하기에 자꾸 퇴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정도면 버틸만하지 않은가 반문했다. 반대로 나는 왜 삶을 버텨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더 나은 것을 추구하면 안 되는지, 왜 힘들 때 쉬어갈 수 없는지, 왜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지 않는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대신 노동이 인생의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노동만으로 인생의 중요한 틀을 꽉 채울 수 있었던 시대를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근로소득과 저축으로 집을 살 수 있었고 노동에 감사하며 끈기 있게 근속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시대를 살았다. 나는 대체 어떻게 그들이 주 6일씩 일하며 길고 긴 근로시간을 버티며 노동력 착취를 견뎠는지 알 수 없다. 무엇이 그런 삶을 버티게 하는지 알 수 없다.
엄마에게 나는 꽤 풍족한 작물을 약속하는 땅을 자꾸만 갈아엎어대는 이상한 농부일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열매가 열릴 시기인데 자꾸 왜 애먼 땅을 뒤짚는지 엄마는 이해할 수 없다.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작물이 제일 안정적인데 대체 뭘 찾아대는 거람. 언젠가는 착실한 농부가 되어야 할텐데.. 걱정하면서.
반대로 나는 땅에서 나는 작물을 먹고 살지만, 그 땅에서 가끔 찾은 동전이나 깨진 유리 조각에 더 매료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 작물을 대충 심기야 하지만 내 즐거움은 그 땅을 갈아엎는 데에 있다. 땅을 파서 재밌는 걸 찾아내지 않을거면 대체 뭐하러 사는 거람. 인생에서 곳간이 꽉 찰 일은 없지만 주머니는 언제나 달그락 거리며 땅 속에 또 뭐가 있을지 궁금해하는 삶 말이다.
퇴사 후 치앙마이에 와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싱가폴 아저씨에게도 ‘젊었을 때는 너와 같은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아니 그리고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일탈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달살기일 뿐인데도!) 나는 ‘어떤 삶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삶은 아무리 풍족한들 살고싶지 않다. 상상력이 없는 삶은 선택권이 없는 삶과도 같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어야 지금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상상력이 없는 삶은 그저 주어진 것이고 걷던 길이지 내가 선택한 길일 수 없다. 오직 상상력이 있을 때 삶의 갈래가 생기고 지금의 선택이 맞는지에 대한 고찰이 생긴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다른 삶의 방식에 늦게서야 매혹되는 것이다. 삶의 멋진 부분을 너무 늦게서야 발견하면 어쩐담. 그걸 즐길 시간이 너무 적게 남아있으면 아까워서 어떡한담. 엄마가 걱정하는 구직 실패 같은 건 그에 비하면 아주 작은 두려움일 뿐이다.
몇 년 동안 한 회사를 다니다 보면 세상이 좁아지고 선택지가 얼마 남지 않은 기분이 든다. 인생에 별거 있나, 퇴근하고 소주 한 잔 마시는 게 최고의 낙이지, 이런 생각으로 매일 점점 소망이 작아지고 즐거움이 소소해지는 날이 온다. 여행은 그럴 때마다 언제나 세상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즐거움이 넘쳐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그 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이렇게나 많은 삶이 있다. 작고 치열한 경기장에서 한없이 얄팍해졌던 시야가 확장된다. 돌아가서 다시 좁디좁은 취업 시장을 뚫고 저녁 있는 삶 정도를 꿈꾸게 된다 하더라도 나에겐 회복된 상상력이 있다. 10년씩 꾸준히 일하면서도 세계가 좁아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부디 은퇴 전에 알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