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기 초보가 찾은 좋은 점과 나쁜 점
치앙마이에 온 지 딱 열흘 째인 오늘, 날짜를 세어보고 35일 일정 중 벌써 1/3을 지나왔다니! 깜짝 놀랐다. 11월에 와서 12월 초에 돌아가는데 11월에 치앙마이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풍등축제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로 아무런 정보 없이 온 여행이었다. 치앙마이행 자체가 퇴사일을 확정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고(한 달 살기를 하러 이미 비행기표를 끊었다는데 회사가 더 이상 어떻게 내 퇴사를 말리랴) 퇴직금을 조금이라도 효율적으로 써보고자 물가가 싼 따뜻한 나라에서 한국의 초겨울을 보내고 오자는 심산이었다. 맘껏 걸어 다니고 수영도 하고 태국 음식도 먹고 술도 마시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오려던 내 여행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20% 정도 성공했다. 전쟁 같았던 3년간의 회사 생활의 보상으로 평화를 찾고 싶었는데 치앙마이는 생각보다 평화로운 도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시끄럽고 불편하다가도 갑자기 잠깐의 평화가 찾아와 어리둥절한 사이 다시 휘몰아치는 도시에 가까웠다.
나쁜 점 1. 생각보다 더 덥더라
최근 거의 10년간은 유럽여행만 다녀서 한참 전에 왔던 동남아의 더위를 잊고 있었다. 11월 건기의 시작임에도 치앙마이는 진짜 덥다. 여행 첫날 식당에서 밥 먹다 만난 여행객에게 ‘오늘만 이렇게 더운 거야 아님 계속 이 정도 날씨야?‘ 하고 물었다가 ‘네가 어딜 왔다고 생각한 거야!’하면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래 나 동남아에 왔지… 유럽도 한여름은 햇빛이 정말 뜨겁지만, 습도의 여부는 역시 체감 온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행히 건기라서 숨 막히는 기분은 아니지만 해가 떠있는 시간에 15분 정도 걷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젖을 정도의 더위다. 평소 땀이 별로 없는 편이라서 이 정도로 땀을 흘려본 게 딱 10년 전쯤 캄보디아 여행에서였던 것이 치앙마이 도착해서야 떠올랐다.
게다가 대부분의 식당이나 카페는 에어컨이 없거나 시원치 않다. 방콕은 큰 쇼핑몰이 많아서 실내에서 더웠던 기억이 아주 많지 않은데 여기는 밥 먹으러 가서도 찬 바람 하나 없이 땀에 절은 채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열흘째인 지금은 요령이 생겨서 일정 사이사이에 에어컨 있는 식당이나 카페를 끼워 넣고 있다. 많지 않아서 쉽진 않다..
나쁜 점 2. 오토바이 운전자가 아니면 기동력이 떨어진다.
치앙마이는 대중교통이 없다. 그것도 생각해 보니 대부분의 동남아는 대중교통이랄 게 없었다. 예전에는 툭툭을 타고 다녔고 지금은 다행히 그랩, 볼트 등의 좋은 택시 어플이 있어서 눈탱이 맞을 일 없이 진짜 쉽게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다. 다만 모든 이동을 택시로 하다보면 슬슬 무시하지 못할 비용이 된다. 시내는 편도에 60~100밧 정도 금액인데 한국돈으로는 3000~3800원. 하루에 대여섯 번만 타도 최소 1만 5천 원~2만 원이다. 두 명이 같이 오면 차라리 낫겠는데 혼자 택시로 이동하려니 의도하지 않은 플렉스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오토바이를 탈 수 있다면 치앙마이는 너무나 기동성이 좋은 도시이다. 나는 자전거를 탈 생각이었지만 도착한 첫날 마음을 접었다. 차 운전이 꽤 거칠고 오토바이가 많은데 그 사이에서 자전거를 타려면 위험한 순간을 많이 만나야 할 것이다. 실제로 현지인은 어느 누구도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오직 갓 도착한 것 같은 여행객들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전거를 탄다. 여긴 무조건 무조건 오토바이 아니면 택시다.
나쁜 점 3. 도시의 전체적인 미감이 떨어진다
도시의 미학적인 부분이 여행할 때 중요한 요소인 사람에게는 동남아 특유의 알록달록한 색감, 생활감이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다. 유튜브나 블로그에서는 예쁜 카페나 완벽한 뷰를 보여주기 때문에 도시 전체적인 미감은 알 수 없었는데 와보니 조금 김이 샜다.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처럼 도시 전체가 고풍스러운 느낌도 아니라서 현실감 넘치는 비닐 천막과 간판이 가득한 거리가 대부분이다. 라탄, 나무 등 아름다운 제품이 많은 나라이지만 그것도 편집숍에 갔을 때나 볼 수 있지 대부분의 식당은 모든 것을 플라스틱으로 사용한다. 커트러리, 인테리어 등을 신경 쓴 공간은 일부의 카페나 레스토랑뿐이다. 대부분은 천막 아래에서 플라스틱 컵과 얇디얇은 철제 수저로 밥을 먹게 된다.
그리 아름답지 않고 실용적이기만 한 숙소를 한 달짜리로 잡아둔 뒤 살풍경한 방이 지겨워 빈티지 가구로 가득한 숙소를 단기로 가보았다. 문제는 나무와 라탄과 아름다운 가구로 채운 방에는 또 벌레와 도마뱀이 있더라. 나무집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당장 내 방 화장실에 네발 달린 도마뱀이 있는 건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하루 만에 돌아온 콘크리트 숙소에 이제는 만족하기로 했다. 예쁜 내 서울 집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나쁜 점 4. 들개가 생각보다 많고 무섭다
들개는 상상도 못 했던 문제점이고 지금 내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이다. 낮에는 개들이 대부분 퍼질러져 누워있지만 에너지 넘치는 몇몇 개들이 나에게 뛰어오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거나 얼음이 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나만 무서워하는 거겠거니 싶어 찾아보니 실제로도 개물림 사고가 꽤 있었고, 특히 밤에는 개들이 사나워져서 낮보다도 더 위험한 상황이 많다고 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에게는 목줄 없는 큰 개가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공포다. 나를 향해 짖거나 으르렁 거리기라도 하면 아마 혼비백산할 것이다. 도망가면 더 위험하다는데 제발 그런 상황이 안 생기기를 바랄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좋은 점들
좋은 점 1. 음식이 진짜 진짜 싸다
동남아 음식을 좋아한다면 여기는 천국이다. 적당한 구글 리뷰가 달린 음식점의 대부분의 가격은 최대 100밧, 4천 원이 넘지 않는다. 두세 개를 시켜도 한국의 메뉴 하나 가격이다. 양이 좀 적은 편인데 그조차도 취향에 맞는다면 여행하기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된다. 혼자 여행하는 경우 여러 메뉴를 시켜도 가격 부담이 없고 다 먹을 수 있어서 난 먹을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만족 중이다. 치앙마이는 무엇보다 치킨의 나라다. 닭을 어쩜 그리 잘 튀기는지, 어딜 들어가서 먹어도 치킨 윙은 실패하지 않는다. 오히려 KFC치킨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길거리가 훨씬 잘 튀긴다.
음식 대부분이 향이 세지 않은 점은 향신료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아쉬운 점이다. 고수도 생각보다 덜 쓰고 향신료를 써봤자 바질 정도다. 난 슬슬 한국인들이 평을 안 좋게 쓴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곳은 대부분 고수를 주더라고.
좋은 점 2. 모든 것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가끔 너무나 아름답고도 평화롭다
더위 때문에 우울해하다가 어제 행복해졌던 이유는 Monk’s Trail 때문이었다. 치앙마이 서쪽에 있는 하이킹 코스인데 30분 정도 길이로 오래 걸리지는 않지만 난이도는 극상이었던 하이킹이었다. 여러 명이 여길 추천하며 어렵지 않다 했는데 비기너 중 비기너인 나는 조난당하거나 야생동물에게 물려가는 것이 아닌지 벌벌 떨며 30분 동안 흙산을 올랐다. 가는 내내 포기할까, 이정표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산을 대체 어떻게 다들 올라간 걸까 했는데 올라간 순간 평화가 찾아왔다.(내려갈 생각에 마음 한편이 무겁긴 했지만) 작고 고즈넉한 사원이 있었고 계곡이 흐르고 여기저기 불상마다 꽃이 올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풀어진 표정으로 사원을 걸었고 나비들이 불상에 앉아있는, 내가 찾던 평화로운 순간이 거기 있었다.
주말에만 열리는 찡짜이 마켓도 행복했던 여정이었다. 숙소가 마침 근처라 금토일 주말 내내 다녀왔는데 일반적인 야시장보다 훨씬 더 젊고 감각적으로 구성해 두어서 너무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농민들이 직접 판매하는 농산물과 음식, 퀄리티 높은 핸드메이드 제품이 가득해서 동남아의 무드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즐길 수 있는 마켓이 아닐까 싶었다.
좋은 점 3. 좋은 재즈바를 부담 없는 술값으로 즐길 수 있다
저렴한 물가에 가장 감사한 순간은 재즈바에 갔을 때였다. 맥주가 다른 곳에 비해 비쌌지만 그래봤자 100밧 3800원. 그 맥주 한 병으로 좋은 재즈 공연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 이태원에서는 칵테일 한 잔에 만 얼마, 별도 입장료까지 내야 누릴 수 있는 호강이다. 물론 여기도 칵테일은 좀 비싸긴 한데 그래봤자 만 원대이고 대부분의 관객은 맥주를 마신다.
나이트라이프를 즐긴다면 치앙마이보다는 방콕이 나을 것이고, 나처럼 바 정도에 만족하는 여행객이라면 치앙마이는 딱 적당하다. 유명한 클럽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갈 일이 없고 분위기 좋은 바들이 몇 곳 있던데 아직 가보지 않았다. 열흘동안 발견한 재즈바 한 곳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서 다른 바들도 기대가 크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가장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행복을 찾는 방법이 아닐까. 모든 행복의 순간은 찰나이고, 예상했던 것보다 언제나 더 적은 기회로 찾아온다. 먼 곳까지 돈을 왕창 내고 찾아와서 일상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순간이 어쩌면 여기에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다가 가끔 운이 좋아야지만 행복의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니까.
아직 나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았고 이 도시에서 발견할 보석이 더 많을 거라 기대한다. 코끼리 보호구역, 끈적끈적한 폭포와 예술가 마을도 가야 하고 요가 수업도 곧 시작이다. 나쁜 점도 늘어나겠지만 그보다 더 빛나는 좋은 점들을 찾아야지. 집에 가고 싶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면 오늘의 더위가 아주 조금 참을 만 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