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일상을 재건하기 위해 도망친 곳
한 여행지에 오랫동안 머물 때 가장 좋은 점은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여행에서 한 도시에 2-3주 정도 머물렀던 경험들은 모두 느긋하고 편안했으며 하릴없이 집 앞 테라스에 앉아있을 수 있는 여유가 가득했다. 계획이나 동선을 짜지 않아도 하루에 맘에 드는걸 한 두 개만 찾아내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 그것이 장기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호사였다.
치앙마이에 한 달 살기를 하러 오며 내가 기대한 것은 일상의 재건이었다. 여행 중 마음이 초조해지거나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것을 되뇌었다. 일상 속에서 아침에 수영을 가고 책을 읽을 수 있는 힘을 되찾는 것, 그것이 이 여행에서 찾아야 할 유일한 것이었다. 곧 다시 구직을 하게 되면 내 일상은 회사와 집으로 꽉 차겠지만 그때도 나를 위해 조금씩 뭔가를 해줄 수 있는 힘을 찾아야 했다. 근래 몇 년간의 회사생활에서 그 힘을 잃어버린 직후였다. 책은 손을 놓은 지 오래였고 수영도 요가도 분명 가고 싶지만 휴일에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회사에서 사람을 만나느라 에너지를 다 써서 정작 내 친구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모든 힘을 고단한 회사 생활을 위해 아껴두려 하는 무의식이 함께하다가 회사를 떠났고 퇴사를 했다 한들 그 힘은 알아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무너진 것이 무엇이든 재건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한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한 도시에 머무르는 경험이었고 총 5주의 일정 중 이제 3주가 지나갔다. 첫 일주일 정도는 오랜만에 방문한 동남아의 더위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고, 나머지 일주일은 약간의 후회와 꽤 많은 외로움을 느끼며 보냈다. 남은 일주일은 치앙마이 근처 소도시인 빠이에 다녀왔다. 재밌는 것은 치앙마이에서 2주일을 보내면서 나름의 적응이 되었는지 빠이에 가서는 치앙마이의 내 익숙한 숙소와 레스토랑들이 그리웠다는 것. 여행 속 짧은 여행을 통해 기분이 환기되며 이 도시를 더 열심히 즐겨야겠다는 의지도 생겼다. 그 짧은 빠이 여행을 다녀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치앙마이 2주 차까지 마음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온 힘을 끌어모아 빠이행 버스를 끊었고 그건 내가 치앙마이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퇴사 후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결정과 노력을 보류하고 도망친 지금, 이제 지나온 시간보다 짧은 시간이 흐르면 곧 그걸 마주해야 하는 귀국이 돌아온다. 아직 나는 완전히 회복된 것 같지 않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느 때고 내가 원하는 만큼 에너지가 충만한 시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3주 동안 한국에 있었다면 친구들과 매일 술 마시고 점점 더러워지는 집을 치우기 싫어하며 침대에 누워있었을 텐데 돈을 들여 여행을 오고 새로운 도시를 걷다 보니 책을 읽게 되고 수영장과 요가를 다니고 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