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데 조금 착잡했던 일주일
태국 치앙마이에서 세 시간을 미니밴으로 이동해야 올 수 있는 마을 ‘빠이’는 분명 특별한 매력이 있다. 내가 빠이에 갈지 말지를 고민할 때 여러 명의 친구가 메시지까지 보내면서 꼭 가야 한다고 추천한 것만 봐도 그렇다. 와보니 몇 달을 하릴없이 이 마을에서 지내는 사람도 있고 시간 날 때마다 여러 번 방문한 사람들도 많았다. 로컬보다는 여행객의 비율이 훨씬 높다는 점에서 첫인상으로는 라오스의 ‘방비엥’이 떠올랐는데 방비엥은 좀 더 클럽과 술, 레저에 집중되어 있다면 빠이는 느긋함 그 자체가 큰 매력이었다. 음식점의 휴무를 생각할 때 말고는 아무도 요일을 신경 쓰지 않고 일주일을 전부 휴일처럼 즐기는 마을, 매일 저녁마다 라이브 바와 길거리 음식점이 어슬렁거리는 여행객으로 가득한 마을이었다.
택시도 없고 대중교통도 없어서 스쿠터가 있어야 제대로 빠이를 즐길 수 있다지만 자전거도 자신 없는 나는 그냥 걸었다. 스쿠터로 15~30분 거리에 가볼 만한 곳들이 많지만 나는 그중 딱 두 가지만 투어로 다녀왔으니 빠이의 아주 일부만 봤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시간동안 15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빠이의 중심지를 종일 걸어다녔다. 보행자 거리가 이 마을의 가장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짧고 작은 그 거리에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모여있었다. 카페에 앉아있다가 서로 인사하며 동행이 되기도 하고 가볍게 추천 레스토랑을 교환하기도 한다. 치앙마이에서는 2주 동안 거의 혼자 다녔는데 빠이에서는 도착한 첫날부터 저녁을 얻어먹고 동행도 생겼다.
예정보다도 체류를 연장하며 일주일을 빠이에서 보내고 나니 이 작은 마을의 무해함이 가진 매력을 알 수 있었다. 왜 사람들이 여기를 여행자의 무덤이라고 부르는지도. 태국의 매력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여행객들이 서로 모여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풍부한 빠이는 여행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일 수밖에 없다. 방비엥 같은 호수나 튜빙도 없고 그저 하릴없이 여행자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거의 전부인 이 마을에서 몇 달씩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습이 거의 비슷해진다. 까맣게 탄 피부에 맨발과 반바지, 남자들은 거의 웃통을 까거나 대충 걸친 셔츠 차림에 부스스한 머리. 언제까지 머물겠다는 계획도 대부분 없다. 언제 빠이를 떠날지 물어보면 Who knows? 하고 웃는 전 세계의 한량들이 다 여기에 있다.
저녁 6시부터 시작되는 보행자 거리의 핵심은 푸드트럭과 라이브 뮤직바다. 개수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길거리 음식을 손에 들고 마음에 드는 라이브를 따라 맥주 한잔씩 하며 옮기다 보면 밤 12시가 될 정도는 된다. 그러면서 옆자리 앉은 사람과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혼자 음악을 즐기기도 하고 나는 가끔 바에서 책도 읽으며 저녁을 보냈다. 밤까지 어슬렁거리는 개들과 사람 손을 좋아하는 고양이들까지도 모두 자유롭고 여유롭다.
일주일을 보내며 아쉬웠던 것은 여기에 아시아 여행객의 비중이 현저히 적다는 것이다. 아마도 중국 관광객이 몰려오는 시즌이라면 비율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성수기의 시작인 11월은 90%가 서양인이었다. 한국인에게도 빠이가 유명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저녁의 보행자 거리와 라이브 바에는 거의 없었고 오직 일출 투어에서 한국인을 많이 봤다. 투어가 끝난 뒤에는 그들을 빠이에서 다시 보지 못했다. 너무 신기해서 다른 나라 여행자들과 대체 한국인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에 대해 대화하기도 했다.
라오스 방비엥과 방콕의 카오산로드에서도 느꼈는데 여행자를 위한 도시, 여행객이 모이는 공간은 대부분 서양인 여행자로 구성되기 마련이고 로컬은 아시안, 그 공간을 향유하는 여행객은 서양인이라는 구성에서 발생하는 권력구조가 나는 언제나 조금 불편하다. ‘여긴 물가가 너무 싸서 좋아’, ‘싼데 너무 맛있어’ 같은 말들도 칭찬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물가가 싸기 위해서는 이들의 임금이 싸야 하고 그 경제적 격차가 수많은 여행객을 이곳에 올 수 있게 했다.
이 불편함은 옐로피버인 한 서양 여행자에게 플러팅을 당하며 더 확실해졌는데 빠이를 마치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자기 인생의 무법지대처럼 여기는 것에 굉장히 화가 났다. 누군가는 여행지에서의 들뜸으로 당연히 가벼운 만남도 가질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걸 ‘새롭고 부담 없는 경험’으로 포장하며, 아시아 여행지에 와서 오직 아시안 여자에게만 치근덕대는 서양인 남자를 보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아시아 자체를 존중 없이 쉽게 즐길 수 있는 경험처럼 치부하는 걸로 느껴졌다. 정도는 다르지만 꽤 많은 서양인 여행객이 그런 태도를 가진다. 우리가 유럽에 가서 들뜬 마음으로 보이는 태도와 그들이 동남아에 와서 들떴을 때 보이는 태도는 확실히 다르다. 후자가 더 권위적이다.
빠이에서 가장 좋았던 공간인 토요일 마켓도 그런 점에서 마음이 복잡했다. 분명 평화롭고 모두 행복한 빠이스러운 공간이었지만 거기에 빠이 사람은 없어 보였다. 오직 마켓의 판매자로서만 현지인이 있었고 소비자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좋은 날씨에 마켓에서 춤을 추는 모든 이가 여행객인 장면에 마냥 행복할 수가 없었다. 주말이나 쉬는 날 빠이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이 시끌벅적한 여행객 사이에서 그들을 위한 공간이 부디 풍족하게 있었으면 싶었다.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본연의 문화를 가진 로컬 플레이스라는 것을 잊은 여행객이 많아질수록, 그곳은 무례함만 가득하게 된다. ‘이국적인 여행지’로만 기능하는 곳은 더 이상 매력적인 여행지가 될 수 없다. 빠이가 빠이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이고 살기 좋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여행자로서 이 여행의 마을을 즐겼지만 이들이 여행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업 외에도 자체적인 소비와 활동이 늘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빠이의 로컬 문화가 여행객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