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회사와 전셋집을 동시에 뛰쳐나오지 맙시다
서울 거주 중인 만 35세 1인 가구가 겁도 없이 직장과 집을 동시에 제 발로 뛰쳐나온 후기. 돈도 없고 청년도 아닌 사람으로서 재직증명서까지 없이 서울에서 이사를 하는 것은 너무 힘든 여정이었다. 아직 진행 중인 ‘청년도 아닌 일반 무직자가 버팀목 HUG 전세대출로 2억 집 구하기’ 프로젝트의 기록.
나의 현재 상태 : 현재 만 35세, 무직, 무주택, 전세 세입자
6년동안 산 전세집의 집주인과 싸우기 전까지만 해도, 직장은 없어도 집은 있는 평화롭고 행복한 백수였는데.. 다행히 전세계약 갱신 청구권으로 연장된 기간이어서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나갈 수 있었던 상황. 3개월 뒤를 맥시멈으로 잡고 그 안에 최대한 빠르게 (집주인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갈 수 있는 집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고를 집도 없어요. 전세 매물 대란!
내가 간과했던 것은 내가 살던 전셋집이 14평대에 1억 초반으로 말도 안 되게 싼 가격이었다는 점과, 24년 1월인 지금은 전세 매물 자체가 없어서 전쟁인 상황이라는 점. 서울 전역을 돌아다녀도 2억 이하 전세금으로는 집이 썩어있지 않고, 보안이 비교적 안전하고, 2룸 이상인 집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적당한 빌라를 찾아서 가보면 재개발 지역에 있어서 창문이나 천정이 썩은 채 방치된 집이었다. 괜찮은 집이 하나라도 나오면 여러 예비 세입자가 경쟁하듯 줄 서기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 부동산에게 아부하며 제발 내가 1순위로 집을 보게 해달라고 빈 적도 있었다. 난 게다가 모든 가전과 가구를 이미 가지고 있는 투룸 거주자여서 집이 좀 넓어야 했는데 요즘 1-2억대 전세는 대부분 9평 이하의 신축 빌라에 풀옵션이었다. 4일 동안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12시간씩 집을 보러 다닌 결과 1순위 후보는 53년 된 맨션 아파트의 최고층인 5층집. 당연히 엘베는 없고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세면대에 하수관이 없던데 그런 화장실에서 살 수 있을까 고민스러워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세 매물 개수도 부족하지만 그중 ‘안전한 매물’이 없다는 게 문제다. 세상이 떠들썩한 전세사기 외에도 사실 전세는 리스크가 크다. 집주인이 죽거나, 다음 세입자가 안 구해지거나, 몇 년 뒤 전세가가 떨어졌는데 차액을 집주인이 마련할 수 없거나, 집주인이 돈이 궁해져서 잘 내던 세금을 밀리는 등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의 수는 너무 많다. 여기에 최근의 대규모 사기 사건까지 더해져 부동산도 세입자들도 예민해진 상황. 위험도가 낮은 집 중에서 내 예산에 맞고 사이즈도 괜찮은데 관리도 잘 된 집이란 사막의 오아시스보다도 더 찾기 어려운 존재였다. 나처럼 월세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전세 세입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얼마 안 되는 안전 매물을 물어뜯고 있었다.
6년 전에 내가 지금 사는 집을 전세로 얻을 때만 해도 부동산과 집주인 모두 전세에 대해 훨씬 나이브했다. 내가 집주인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겠다고 할 때도 부동산은 코웃음을 치며 ‘요즘 젊은 친구들이 인터넷에서 참 많이 배워오죠잉~’ 하고 웃었다. 이번에 계약할 때는 분위기가 정말 달랐다. 인터넷에서 찾아간 특약도 모두 기본으로 들어가 있었고 집주인과 내 주민등록증을 서로 정확히 확인했으며 계약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소리 내 읽은 뒤 날인했다. 모든 전세사기 피해자들도 아마 이렇게 꼼꼼하게 계약하고도 당했겠지 싶어서 떨리고 불안했다.
예산에 맞춰 50년 된 썩은 집에 들어갈까 백만 번 생각하다가 나는 결국 예산을 높여서 집을 계약했다. 대출을 미친 듯이 알아보고 무직자도 1억대 대출이 일단 가능은 하다는 걸 일단 확인한 뒤 어쩌면 위장 취업이라도 해야 한다는 각오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기천만원대의 계약금을 냈고, 은행 대출 심사를 넣어봐야 맞는 선택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것처럼 살아야 할 텐데 미칠 노릇이다.
곰팡이가 없다면
좀 걸어도 괜찮아요
부동산에 ‘안전한 매물인가요?’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모든 부동산이 안전하다고 말한다. 융자가 있어도 얼마 안 된다든지, 시세의 30% 미만이라든지 근거를 대며 안심시킬 것이다. 하지만 억대의 돈을 은행에서 빌려서 생판 남에게 맡겨야 하는 사람으로서, 확률 게임을 하기엔 이건 너무 큰 도박이다. 나는 힘들지만 가장 안전한 형태의 전세 거래를 원했고 그 와중에도 사이즈, 층수 등 조건이 많아서 힘들었던 케이스다. 4일 동안 집을 보며 도저히 내가 원하는 금액대에는 집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야금야금 올라가던 예산은 150%까지 올라갔다. 물론 나에게 돈은 없었다. 지금 전셋집에 묶인 돈 말고는 사실 거의 한 푼도 없었다. 게다가 백수인지라 더 막막한 상황.
이번에 느꼈는데 앞으로 전셋집을 구할 때는 처음부터 예산을 넉넉히 상향해서 부동산에 문의하는 것이 좋겠다. 돈이 없더라도! 왜냐면 어차피 금액을 올릴 수밖에 없거든.. 차라리 높은 금액의 집까지 한 번에 싹 돌아보고, 만약 도저히 저예산에서 고를 집이 없다면 부족한 차액을 구할 수 있을지, 안된다면 집의 요소 중 어떤 걸 포기하고 예산을 맞출지 생각하는 게 낫다. 적은 예산에서 한정적인 집들, 그것도 다 썩어가는 집들만 보다 보면 지치기만 하고 결국은 시간이 부족해서 혹시라도 금액을 높이기로 마음먹은 뒤에는 집을 볼 시간이 부족해진다.
넓고, 깨끗하고, 싸고, 역과 가깝고, 예쁜 집은? 우리의 예산 내에서는 이 세상에 없다. 나도 조건이 많은 세입자였지만 그중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지를 미리 생각해 두었고, 위치와 건물의 연식은 미리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멀어질수록 같은 가격에도 집의 컨디션이 좋아지고 넓어진다. 역세권을 원한다면 집의 사이즈가 작고 컨디션이 안 좋아질 수 있다는 걸 감안할 수 있는지 미리 생각해 두는 게 좋다. 나는 곰팡이가 없고 채광이 좋으며 주변에 산책할 곳이 있고 층간소음이 없는 집을 원했지만, 결국 곰팡이는 없지만 채광은 조금 덜하고, 주변 산책로는 부족하지만 중문이 있어 층간소음은 비교적 적을 집을 골랐다. 예산을 150% 올렸는데도 채광은 결국 내려놓아야 했다. 4일째에는 반지층이 아닌 게 어딘가 싶었다.
어딘가 내 몸 누일 곳 하나는 반드시 있다는 믿음 잃지 말기
서울 살이에서 4번째 집을 계약하며 내린 또 하나의 결론은, 어찌 되었든 결국 집을 구하기는 구할 수 있다는 것. 희망을 잃지 말자. 하루이틀 집을 보다 보면 ‘이렇게 아파트가 많은 세상에 내 집 하나가 없다니?’ 하는 좌절감이 든다. 하지만 나는 15년 동안 혼자 서울에 살면서 치렀던 여러 이사 경험에서도 그랬듯 이번에도 결국 일주일 안에 이사할 집을 찾아냈다. 오래 볼 필요도 없다. 왜냐면 좋은 집은 어차피 며칠 내에 나가거든. 집을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일주일 내에 매물로 나오는 집 중 어쨌건 반드시 내 집이 있다. 그 믿음을 잃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돈 한 푼 없이 예산을 올려서 고민해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버팀목 HUG 대출 때문. 이게 정녕 무직자도 1억 2천 최대 금액으로 가능한 대출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은행 6군데를 다녀왔는데 그중 단 한 군데만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 머리 터지는 대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뤄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