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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Mar 05. 2024

이직처 없이 생퇴사할 때 가장 힘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가 답일 때도 있는 법

30대에 팀장직을 퇴사하며 주변에서 정말 많은 만류와 걱정을 들었다. 다들 나에게 아깝지도 않냐며 버티라고도 하고, 아니면 자리를 구하고 나오라고 난리였다. 유례없는 채용 한파라는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출국 날짜에 맞춰 대책 없이 뛰쳐나온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후회도 없다. 퇴사 후 한 달의 여행을 포함해 석 달 정도를 쉰 지금까지 걱정하던 사람들의 우려와는 전혀 다른 것이 나를 힘들게 하더라. 내 경력이 너무 길다는 것과, 불안. 그 두 가지가 퇴사 후 휴식기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윗분들이 왜 죽어도 안 나가는지 알겠어

실무자일 때보다 관리자일 때 이직이 힘들다. 상급자로 올라갈수록 갈 곳이 적어진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때는 실무자는 어쩔 수 없이 뽑아도 관리자는 어떻게든 줄일 방도를 찾는다. 없던 자리가 더 줄어드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생퇴사를 저지른 이유는, 반드시 팀장 자리를 고수할 생각이 크게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 규모가 좀 크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실무자로 돌아갈 생각이 있었다. 팀장을 맡은 지 3년밖에 안되어서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했다.


간과했던 것은 팀장이었던 사람을 팀원으로 뽑고 싶어 하는 팀장이 없다는 것. 아예 좆소도 아니고 애매한 중소~중견이었던 회사의 팀장 경력은 꽤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실무를 하고 싶어도, 그 회사의 팀장은 나를 반기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무자로 가서는 연봉을 맞춰주기가 어렵다. 만약 연봉을 내려서까지 직급을 낮출 의지가 있다 해도, 그걸 서류나 면접에서 확실히 보여줄 방법이 없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도 부담스럽다거나 오버스펙이라는 이유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력뿐 아니라 나이도 부담감에 한몫하는 것은 물론이다.


불안에게 가스라이팅 당하지 말자

생퇴사의 가장 큰 문제는 돈도 이직처도 아닌 불안감이다. 불안이 퇴사자를 잠식한다. 나는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석 달째까지 구인 사이트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장 괴로운 것은 불안감이었다. 가끔 만나는 전 회사의 동료들이나 상사가 자꾸만 나에게 '어디에 들어갔냐'라고 물어볼 때마다 조금씩 불안이 커졌다. 제일 우스운 건 '아직도 놀아? 그럼 다시 들어와' 라며 재입사를 제안한 상사였다. 그 제안을 듣고 생각했다. 불안을 이용해서 나를 가스라이팅하게 하지 말자. 정 안되면 차라리 알바를 하고 말지, 재입사라는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디든 자리는 있다. 무조건 있다. 조금 늦어질 수도, 생각보다 조건이 나쁠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반드시 찾을 수 있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생각을 기도문처럼 외웠다.


기왕 생퇴사했다면 쉴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

한번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쉬는 기간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나는 중간중간 몇 개월씩 자주 쉰 경우였지만 주변 대부분은 한번 취업을 하면 쭉 10년 이상 근속과 환승이직으로 회사 생활을 이어간다. 환승이직은 어떻게든 인력 공백을 줄이려는 두 회사 사이의 조율이기에 정말 운이 좋다면 1주 정도를 쉴 수 있다. 하루의 텀도 없이 퇴사 다음날 바로 새 회사에 들어가기도 한다. 즉 직장인으로 살면서 맘 놓고 쉬려면 '생퇴사' 말고는 답이 없다는 뜻이다.


이번에 퇴사하면서 다음 이직처를 구하는 게 아주 쉽지는 않겠다는 것이 보이자 나는 오히려 구인을 잠시 내려놓았다. 아마 앞으로는 이 퇴사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 불안했고, 다음부터는 이 불안을 더 오래 견뎌야 할 것이다. 환승이직을 하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남는 방향을 택할 수도 있다. 즉 내가 나에게 허락하는 대책 없는 퇴사자의 시간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래서 놀았다. 치앙마이에서 한 달살이 하는 것을 진심으로 모든 생퇴사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생활비도 한국보다 싸고 한달 동안은 면접도 볼 수 없으니 강제 휴식이다. 그 후에 이직 준비를 해도 늦지 않다. 우선은 쉬자. 쉬지 못해서 환승이직도 할 수 없었던 우리들이다.


누군들 이직처를 구하고 나오는 게 좋다는 걸 모를까. '생퇴사'는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의 정답이다. 너무 갈려나가서 다음 스텝은커녕 당장의 출퇴근도 버거운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답이다. 불필요하고 지나치게 퇴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다. 완벽하게 이직을 하지 않더라도, 잠시 백수가 되어도 좋으니 마음이 무너지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라도 도망쳐야하는 회사와 환경들이 분명 있다. 너무 많아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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