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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Mar 15. 2024

펠리칸이 한 달 사이에 세 마리로 불어난 사태에 대하여

가격대가 다른 만년필 세 자루가 주는 즐거움

만년필은 가성비에서 가장 먼 존재다. 볼펜이 아니라 만년필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실용성과는 이별을 고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만년필의 가장 이상한 포인트는 가성비가 너무 좋다는 점에 있다. 1천 원짜리 만년필도 100만 원짜리만큼 글씨를 끊김 없이 쓸 수 있고 만년필로써의 기능에는 하자가 없다. 세상에 이렇게 저렴한 가격대로도 최고가 모델과 같은 기능을 누릴 수 있는 상품은 없을 것이다. 또 반대로 이토록 사람들이 기능적인 이유 없이 고가품을 구매하는 상품군도 없을 것이다. 비싼 시계에는 최소한 기온과 기압차를 견딘다는 기능적인 이유라도 있지. 만년필은 고가 만년필도 오래 안 쓰면 잉크가 굳고 비행기 타면 잉크가 터진다. 그래도 사람들은 비싼 한정판 만년필을 못 구해서 난리다.


만년필을 다시 쓰기 시작한 지 한 달 새에 펠리칸 브랜드의 만년필을 3개나 들였다. 각각 10만 원대, 20만 원대, 50만 원대를 종류별로 한 개씩 구매했다. 펠리칸 새의 부리 모양을 본뜬 클립이 시그니처인 이 독일 브랜드는 한번 쓰면 계속 이 브랜드를 구매하게 된다고 해서 '조류독감'이라는 별명이 있다. 10년 전 만년필을 처음 쓸 때부터 갖고 싶었던 브랜드였는데 이제야 그 기억을 떠올리고 구매하다 보니 어느새 3개가 되어있었다. 10만 원짜리로도 글씨는 차고 넘치게 쓸 수 있는데 왜 50만 원짜리를 구매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만족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왜 쓸데없는 사치품을 사게 되는가에 대한 고찰이랄까.


펠리칸 만년필 3종은 각각 펜촉 소재가 다르다. 20만 원대까지는 스테인리스 스틸닙, 50만 원대가 골드닙이다. 촉 하나가 바뀌면 필감이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50만 원짜리 펠리칸 M800은 3대 만년필로도 불리는 3가지 대표적인 모델 중 하나인데, 그중 출시 이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판매되는 만년필 2개 중 그나마 저렴하다. 나머지 하나는 100만 원이 넘는 몽블랑 149, 다른 하나는 절판되었다가 복각판으로 나왔지만 혹평이 자자한 파커 51이다. 세계 3대 만년필을 그나마 파산하지 않고 경험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모델인 것이다.


내가 구입한 건 M200, M400, M800 이렇게 3가지인데 각각의 이유로 만족스럽다. 초록색 M200은 몇 년 전 한정판인데 현행 온고잉보다 싼 가격에 구매해서 기분이 좋고 M400은 모종의 이유로 일반 인은 절대 불가능한 할인을 받았다. M800은 역시 지나간 한정판인데 물량이 거의 없어서 조금 비싸게 주고 산 편이지만, 세계 3대의 위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게 특별한 필감을 자랑한다. 유리 위를 약간의 마찰력이 있는 부드러운 것으로 밀어내는 듯한 필감이다. 너무 매끄럽지만은 않아서 더 마음에 든다. 캐릭터가 꽤 있는 부드러운 필감이다.


이 필감이라는 게 얼마나 작고 소중한 차이냐면, 금속 펜촉의 아주 미세한 틀어짐만으로도 긁는 느낌이 나기도 하고 오래 쓰면 금속이 약간 닳으며 부드러워지기도 한다. 금속이 ‘종이’에 마찰되어 닳아 없어지는 그 미세한 차이로도 필감이 바뀌는 것이다. 필감은 사실 취향의 영역이고 만년필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쥐어줬을 때는 부드러운 것과 사각이는 것 중 뭐가 더 비싼 펜인지 알 수 없다. 돈이 많아도 사각이는 저렴한 펜이 더 좋아서 쓰기도 한다.


다만 취향에도 단계가 있는데 부드러운 필감은 돈을 더 내야 경험할 수 있기에 진도로 따지자면 뒤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와인을 처음 마실 때는 편의점의 달디단 저렴이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음식과의 마리아주를 생각하며 단 맛이 적고 밸런스 있는 와인을 경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과 같다. 무조건 달지 않은 와인이 더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금액을 좀 지불해야 경험할 수 있는 취향의 단계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 단계를 우연히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도록 M200에서 M800까지 모든 모델을 사용해 볼 기회가 생겼고, 각각의 모델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10만 원대의 M200은 부드러우면서도 조금 거친 사각거림이 있지만 디자인과 잉크 저장량이 많다는 점 때문에 그 가격대에 만족스럽게 사용 중이다. 50만 원대의 M800은 사실 관세까지 물어 60을 넘는 금액이지만 이제 점점 구하기 어려운 한정판인데 늦게나마 알게 되어 구했다는 안도감과 필감에 대한 만족도가 더해져 최애가 되었다.


만년필 입문이라고 하면 다들 몇 천 원대, 만 원짜리 만년필을 추천하지만 나는 솔직히 십만 원 대 이상의 만년필이 진정한 입문이라고 생각한다. 필기구로써의 기능의 차이는 크게 없다 할 수 있고, 천 원이든 십만 원이든 글씨만 잘 써진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만년필이 그 자체로 이미 사치품이기 때문이다. 사치품은 기능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 브랜드의 역사, 그 모델이 상징하는 가치, 미세한 완성도의 차이에서 오는 만족도가 사치품의 기능이다. 이왕 즐거움을 위해 돈을 쓴다면 저렴함과 가성비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만년필을 쓰며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정상 저렴한 가격대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면, 상위 모델과 사실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위안 삼아도 되겠다는 진실과 함께. 경제력과는 별개로 필요성이 아닌 취향에 의해 결정하는 작은 사치들은 그 자체로 이미 즐거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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