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은 오밤중에 야식이 땡기면 꼬들꼬들한 라면을 한 냄비 끓여 먹곤 한다. 라면을 냄비채 식탁에 올리고는 냄비에 코를 박고 후루룩 거리는 녀석 옆에 냉면그릇을 가져다준다. 여기 담아 먹으면 되는데 왜 냄비째 먹냐고 타박하면 늘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아... 그 큰 그릇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자잘한 꽃무늬 코렐 냉면기는 5년째 우리 집 부엌 가운데 싱크대 제일 윗 칸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 아들에게 몇 번 알려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냉면기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라면을 냄비채 먹을 수밖에 없다는 녀석 앞에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라면과 라면 냄비가 어디 있는지는 아는데, 유독 냉면기의 위치만 5년째 모르려면 녀석에게도 상당한 무심함이 필요한 일이다 싶었다. 아마 라면을 냄비채 먹기 위해서라면 10년이 지나도 냉면기의 위치는 모른다고 말할 녀석이다.
학교에서 하루 중 가장 분주한 아침시간.
"00아 이 종량제 봉투 좀 지정된 장소에 버리고 와 주세요~"
"어... 거기가 어딘지 모르는데요?"
학교 도서관 문 앞에서 심부름을 받아 든 도서부 00 이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00 이는 결국 심부름을 하지 않았다. 정말 몰라서 심부름을 못한 것인지 하기 싫어서 모른다고 한 것인지 나는 절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6개월 출근한 나도 알고 있는 장소를, 6년을 다닌 학생이 모르는 장소라면 00 이는 졸업할 때 까지도 모를 것이라는 점이다. 그 누가 가르쳐 줘도 무조건 모를 예정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가르쳐줄 수 없을 확률이 더 높다.
단순히 쓰레기 버리는 장소나 라면그릇의 위치 정도야 몰라도 사는데 큰 문제가 없겠지만 매번 '모르는 것을 무기로 선택하는 습관'은 앞으로 어떤 기회를 놓치는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모르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설혹 그의 삶에 꼭 필요한 무엇일지라도 말이다.
안 해봐서 못해요, 몰라서 못해요, 안 가봐서 못 가요, 처음 들어서 할 수 없어요. 제가 원래 그 부분은 약해요....
유독 모르는 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를 '모르는 사람'으로 정의함으로써 상황에서 열외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 우리는 당연하게도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알아가며 산다.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알아갈 여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만 모르는 것을 무기로 사용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평생 알아가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것을 만났을 때 열외자가 아닌 질문을 선택한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요?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건 뭔데요?
설명을 먼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시범을 한 번만 볼 수 있을까요?
인간은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나누는데 인색한 종족이 아니다. 대부분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에게 너그럽다. 함께 알아가고, 함께 배워가고, 함께 성장하고, 함께 산을 오르는 게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르는 것을 무기로 사용하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줄 수가 없다. 알려 줘 봐야 더 많은 부정어가 돌아올 뿐. 원망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나는 진짜 나이가 많아서 설명해 줘도 몰라요.
여기서만 살아서 그런 건 몰라요.
예전에 비슷한 거 봤었는데 봐도 모르겠더라고요.
나는 원래 그런 거 잘 몰라요.
굳이 상대방의 부정을 강화시킬 이유가 없기에, 열외를 인정하는 것이 빠르고 깔끔하기에, 선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그들을 포기해줘야 한다. 그들은 그 순간을 모면한 것처럼 느끼겠지만 인생은 결코 스스로 넘지 않은 산에 나를 올려주지 않는다. 넘어가지 않으면 돌아가도 돌아서도 결국 막다른 벽은 만나고야 만다. 넘을 때까지 계속. 그러니 꼭 한 번은 물어보고 싶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렇게 계속 모르는 것 투성이의 세상을 돌고 돌아도 괜찮겠어요? 한 번쯤 알아가는 존재로 살아보는 용기를 내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