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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닷 Aug 15. 2024

달리기가 필요한 때

우렁차던 매미소리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하는 여름밤이다. 귀가하는 길에 문득 오늘 꼭 달리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뚜라미 울어대는 서늘한 가을밤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분명 잠시 강변을 달릴 정도의 용기는 내어 볼만한 그런 밤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간 애태웠던 여러 강연일정이 오늘을 마지막으로 무사히 다 끝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입추도 지난 여름의 끝자락을 핑계 삼아 정말 오랜만에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세차게 고개를 들었다. 고생 많았다며 오늘 가서 푹 쉬라는 누군가의 인사말을 듣고 달리기가 떠올랐다. 달리기는 영혼이 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발장을 열다 알아차렸다. 봄의 시작과 함께 발길을 끊은 아파트 헬스장에서 여태껏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낡은 러닝화. 달리고 싶은 마음과의 만남이 이렇게나 오래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피식 웃음이 났다. 탈짝탈짝 슬리퍼를 끌고 나가 헬스장의 러닝화를 데려와 갈아 신었다. 발목과 뒤꿈치를 탄탄하게 잡아주는  러닝화에 두 발을 밀어 넣고 오른손에 손수건을 움켜쥐자 가슴에 시동이 걸린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으며 준비 끝.


잠시 스트레칭을 가볍게 하고 빠른 걸음으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강변을 향했다. 아뿔싸. 눅진한 여름밤의 후텁함은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잠시 주춤하는 순간 짧은 팬츠에 헤어밴드를 두른 동네 러너들이 우루루 내 곁을 지나쳐 간다. 헛둘헛둘 서로의 움직임에 박자 맞춰 깃털처럼 가볍게. 훗! 저 정도는 나도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여름 사서 직무연수 시간에 업무시 안전한 관절이용을 위한 다양한 운동을 배웠다. 겸해서 바르게 걷는 법과 달리는 법을 알려주는데 새삼스럽다 생각했었다. 지금 그림같이 떠오르는 전문 강사님의 포즈와 내 움직임을 이렇게 매칭시키며 달리게 될 줄 미처 몰랐다.


발은 11자로, 코어에 힘을 주고 머리 위치는 어깨와 나란히. 양 어깨가 솟아오르지 않게 날개뼈끼리 가까워진다는 느낌으로 눌러주며 양팔은 자연스럽게 앞뒤로 흔들 것. 발 뒤꿈치 먼저 땅에 닿고 검지 발가락을 축으로 무게중심이 뒤꿈치에서 발 날개를 지나 앞꿈치로 이동하게끔 땅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것. 목이 앞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할 것. 마음은 벌써 마라톤 선수다.


이 속도면 강변 산책로 입구에서 공원이 끝나는 곳까지 왕복으로 달릴 수 있겠다는 호기로운 마음이 일렁일 때쯤 안경 가득 습기가 차올랐다. 땀방울과 습기에 가려서 안 보이나, 안경을 벗어서 안 보이나 같은 상황. 안경 따위 과감히 벗어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세상은 달빛에 일렁이는 강물결과 드문드문 가로등 불빛아래 나타나는 총 천연색 사람들, 두 가지로 간결해졌다. 괜찮다. 달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할 것 같지 않은 밤이므로.


점점 숨이 가빠진다. 콧구멍으로 깊게 들이마신 공기를 작게 벌린 입술사이로 박자 맞춰 나누어 내뱉었다. 여름밤의 강변에서는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계절의 냄새도 모르고 여름을 보낼 뻔했다.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가슴이 뜨거워진다. 아무래도 공원 끝까지 가는 것은 성급한 목표라고 심장이 다급히 알렸지만 무시하고 싶다. 차오르는 호흡에 귀 기울이며 목표 수정을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짧은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한 남자. 그가 잠시 멈추듯 속도를 줄이고 선다. 시선의 방향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 같지만 눈뜬 장님과 다를 바 없는 나는 그의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찰나의 순간 멀찍이 스쳐 지나가며 본 그의 각진 체형이, 운동복의 실루엣이, 그 키가... 어떤 남자를 아득한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인가? 그였다면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쳐서는 안 되는 건데! 나도 멈춰 섰어야 했나? 돌아가서 확인해야 하나? 아니.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을 뿐,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공원의 끝이 보인다. 발 앞꿈치를 자신 있게 밀어 찰수록 무릎이 가볍게 높이 올라온다. 근육을 일정하게 쓰니, 속도도 일정하게 유지된다. 스치는 강바람에 잔머리가 뒤로 흩날린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에 티셔츠가 흥건해질수록 달리고 있다는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안 쓰던 근육을 오랜만에 다그치니 허벅지와 심장이 계속 불편을 호소하며 그만하면 됐다고, 그만 달리라고 유혹한다. 원래 계획의 절반만 달리는 것으로 내적 합의를 도출했다. 검은색 트레이닝복의 남자도 적당히 불필요한 기억으로 정리해서 망각의 어느 구석으로 대충 구겨 던졌다.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강변을 일정한 속도로 달리며 여름밤을 누리고 있는 '나'뿐이다.


잡념의 늪을 지나는 동안 목이 앞으로 쭉 나와 있었다. 얼른 머리를 어깨라인으로 당기고, 솟아오른 어깨를 눌렀다. 상체를 곧게 하고 코어에 힘을 주며 다시 달리기에 집중했다. 움켜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점점 더 거칠어지는 내 호흡에 귀 기울였다. 국지성 게릴라전을 펼치듯 산만하던 뇌 구석구석까지 피가 온몸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지금 정말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준다. 공원의 끝에서 방향을 돌려, 왔던 길의 절반만 더 달리면 집으로 갈 수 있건만 슬슬 속도는 더뎌지고 발바닥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러닝화를 방치했던 이유가 이제야 생각난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검지발가락 쪽으로 휘는 무지외반증. 많이 걷거나 달리면 발바닥 통증이 심해지는 증상 때문에 달리기를 관두고 수영으로 운동종목을 변경했었다.


헬스장까지 신발을 찾으러 가서도 무지외반증을 떠올리지 않았다니! 나는 왜 이 밤에 갑자기 이토록 달리고 싶어 졌을까? 어쩌면 오늘 그림책 강연을 위해 올라갔던 무대에서부터 집까지 따라와 버린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만들어낸 반사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방문했던 강연장은 2층 구조의 500석 규모로, 한때 아동극 배우로 활동하던 당시 올라갔던 무대 이후 가장 큰 무대였다. 청강인원이 그만큼 많았던 건 아니지만, 감정을 출렁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늦은 나이에 홀로 서고, 사서가 되고, 작가가 되어 다시 이런 무대에 서게 되기까지 지나온 시간들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헤짚었다. 흙탕물을 휘저어 놓은 듯 뒤섞인 기억들의 소란을 조용히 가라앉힐 방법이 필요했다. 달리는 동안 오늘을 차곡차곡 잘 정리해서, 다시 내일로 나아가게 할 힘이 내게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화끈거리며 뻐근함이 느껴질 때쯤 집에 도착했다. 조깅화를 벗자 흠뻑 젖은 양말 속 오른발 바닥에 엄지손톱 만한 물집이 인사한다.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있는 발바닥 살이 좁은 운동화 안에서 구겨진 채 겹쳐져서 달리는 동안 짓눌린 것이다. 절뚝거리며 양말을 벗었다. 내 안에 떠다니던 찌꺼기들이 화끈거리는 발바닥과 함께 홀랑 다 타버린 듯 잠잠하다. 달리기를 멈추니 되려 더 많은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신발장 거울에 비친 나는 바지까지 축축한 채로 우뚝 서있다. 내가 무엇을  왔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땀이 선명히 보여준다.


내일도 나는 말간 얼굴로 일어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든다. 여름도 잘 보내주고, 가을도 잘 만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달리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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