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된 기억의 쓸모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되는 걸까? 믹스커피를 볼 때면 종이컵 하나에 믹스커피 두 봉지를 시원하게 뜯어 넣던 그녀가 생각난다. 무딘 칼을 쓸 때면 언제나 칼을 날카롭게 갈아두는 걸 좋아했던 그 사람이 생각난다. 놀이터에 오후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면 그림자에 색이 있는 듯이 사진을 찍어내던 그분이 떠오른다. 꽃무늬 찻잔을 볼 때면 매년 생일선물을 건네던 선배가 생각난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가까운 사람은 뒤통수만 보고 알아차릴 수 있다. 체취, 몸짓, 걸음걸이, 말투, 키나 체형... 그 사람 특유의 형상을 뭉친 기억으로 알아차린다. 함께 보낸 시간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으로 그 존재를 기억하게 된다. 함께 걸었던, 놀았던, 들었던, 나누었던, 먹었던, 갔었던 모든 물건과 공간에 함께했던 기억이 머무른다. 일상적이었던 경험도, 강렬했던 경험도 같은 무게로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무작위로 각인된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고, 잊기 싫어도 잊힐 수 있다. 기억에는 선택권이 없다. 해석을 달리하며 기억을 편집해 볼 뿐이다. 너와 겪었던 고생도, 괴로움도 다 좋았노라고 해석한다. 싸구려 식당에서의 저녁이 제일 맛있었다고 편집한다. 길을 잃고 헤매었던 그때가 지금에서야 재미있었던 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석이야 말로 오롯이 내 선택이다.
아이를 골라서 잉태할 수 없고, 내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이웃도 골라서 만날 수 없다. 인연은 그냥 온다. 우주 만물의 연결과 작용의 결과로 툭. 오는 것이 인연이다. 그리고 만났던 자리에 영원히 머물러 있다. 헤어졌어도, 멀리 떠났어도, 심지어 죽었어도 없던 인연이 될 수 없다. 함께 걸었던, 놀았던, 들었던, 나누었던, 먹었던, 갔었던 모든 물건과 공간에서 그 인연은 여지없이 가슴에 떠오른다. 물가를 걷기만 해도 수면에 비치는 나를 막을 수 없듯이, 생을 이어가기만 해도 수많은 공간과 맥락에 머물러 있는 인연들의 기억을 떨칠 방법이 없다. 다만 내 얼굴 아래 말갛게 겹쳐 떠오르는 기억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잘 해석해 내는 것. 그것만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한 가지이다.
그때의 나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그날의 너와 나는 어리석고 미숙했었지만 덕분에 좀 더 영민한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곳에서 너와 나는 아픔이었지만 아픔의 열기로 나는 굳건히 잘 영글었다고, 너와 했던 실수들은 돌이킬 수 없지만 실수가 무엇인지 알게 된 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를 위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래야 끊임없이 생겨나는 새 인연을 두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다. 알면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알면 더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잊히지 않고 각인된 기억은 이렇게 쓰라고 내게 머물러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