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대장 May 06. 2021

다시 시작한다면 이번엔 잘할수 있을 것 같은데

힘들지 않냐..

도서관에서 "희망일자리 참여자"는 나를 포함해 4명이었고, 우리는 2인 1조로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있다.  같은 조였던 언니가 이번 10월부터는 일이 생겨서 다른 조로 바꾸었다. 그 바람에 낯선 사람과 같은 조가 되었다. 이름으로만 알았던 사람 중에 한 분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잠시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내 뜻을 전했다. 나는 1층 로비에만 있기가 싫으니 근무시간 내내 도서관 각 실마다 혼자 다니고 싶다 했다. 상대방은 너무 혼자 고생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과 함께 정말 괜찮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만약에 다리가 아파서 잠시 쉬고 싶다면 업무를 바꿔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추석 연휴 후에 출근한 터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간단히 인사만 나눈 후에 곧장 도서관의 이곳저곳 실을 드나들며 지원 요청할 것이 있다면 일거리를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사서 선생님들은 반납된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는 것 외엔 할 일이 없다고 하여 나는 하릴없이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것은 성질이 날 만큼 못 참는 성격이어서 나는 계속 도서관 이곳저곳, 여기저기, 왔다 갔다, 돌아다니면서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하여 주어진 임무가 결국에는 책 한 권,  한 권 정성스레 닦는 일이었다. 그래도 1층 로비에서 체온 체크하는 일보다는 재미있었다. 손을 쉼 없이 움직 일 수 있으니까.


맨  꼭대기 책장의 책들에는 먼지가 쌓여있어서 꼭대기 책장의 책들 위주로 닦았다. 도톰하게 쌓인 먼지를 한 방향으로 긁어내면서 닦는 일을 하고 있자니 그 쾌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쌓인 먼지가 사라진 책장과 책들을 손으로 쓸어보고 뽀득해진 감촉을 느끼니 굉장한 일을 한 것 같았다. 또, 표지를 닦고 있자니 어떤 책에서는 고추장이 묻어 나오고, 어떤 책에서는 거뭇거뭇한 손 때가 씻겨지는 게 눈으로 확인될 때마다 기분이 매우 매우 좋아졌다. 먼지 닦는 이 간단해 보이는 일을 혼신을 다해 최선을 받쳤기 때문에 '일 했다'는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퇴근할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1층 로비로 잠시 내려갔다. 오늘 처음 만난 인연이지만 앞으로 함께 할 같은 조 언니가 나보고 힘들지 않으냐고 했을 때, 나는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팀장님. 실장님. 사장님. 20대 때 했던 알바의 직원 오빠, 지점장님 등등등..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내게 '힘들지 않냐'라고 물어봐주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들이 한꺼번에 내게 묻는 것 같았다.


'힘들지 않냐.'


힘들지 않다. 특히 지금 도서관에서 일하는 거 이거. 너무 힘들지 않은데.. 그럼 내게 있어서 힘든 건 뭘까.


도서관에서 하는 일과 그동안 회사에서 했던 일을 일대일로 비교할 순 없지만, 그래도 비교해보자면 도서관에서 이렇게 쉼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다. 근무시간이 짧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회사 다닐 때 했던 일은 힘들었다. 그동안 회사 다니면서 했던 일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내  일은 내 노력의 결과물이었는데 그 결과물에 대해 항상 최종 결정권자에게 평가받아야 했다. 평가와 의견이 여러 차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점차 완성에 가까워져 갔고, 최종적인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나는 내가 항상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의 근거를 찾아서 디자인을 했지만 내 안목에 대해 평가받아야만 했던 과정 속에서 경력이 쌓일수록 깊어지거나 넓어지기보다 쪼그라들었다. 클라이언트의 주관적인 평가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해 내 디자인이 엉망이 될 때면 자괴감마저 들었다. 내 모습이 쭉정이 같아질수록 기술분야로 노선을 바꿔 집요하게 파고든 것도 이러한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설득하지 못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지 못한 내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후회됐다. 근데 다시 시작한다고 해서 잘할 수 있을까.


도서관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서랍 속에 버리지 못한 내 명함을 봤다. 다시 시작한다면 이번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만 더 해보면 안 될까?



매거진의 이전글 빠르게 흩어지는 세상 속에서 존재의 중심을 잡기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