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많은 나라를 여행해보지는 않았지만,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건 그곳에서 많이 나는 식재료를 활용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사는 동네를 예로 들자면 감이 그러한데, '잘 키운 감나무한 그루만 있어도 배곯을일이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예로부터 감나무는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문득 산책을 나섰던 어느 저녁, 수 십 개의 등불처럼 나무에 매어 달려 어둠을 밝히던 선명한 주홍빛 열매들- 찬란하고 넉넉한 그 풍경을 보고서야 알았다.
아무튼 감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이 나다 보니, 반시나 홍시, 식초, 곶감은 물론 감 장아찌, 감주(酒), 감차(茶), 감 떡, 감빵, 감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감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시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태국에서 망고가 꼭 그런 과일인 것 같았다.
'망고 스티키 라이스'라는 망고 디저트를 보고 나는 확신했다.
'아아, 태국 사람들도 망고를 어떻게든 하고 싶은 게 틀림없어...!'
하다 하다 망고를 밥과 함께 먹다니, 그러니까 가공하지 않은 생과일을 탄수화물과 함께 먹다니, 정말 문화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비주얼에 한 번 놀라고, 의외로 맛있다는 평에 두 번 놀라며 나는 태국에 여행을 가면 이 요상스러운 디저트를 꼭 먹어보겠다고 다짐했다.
처음으로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먹어본 곳은 치앙마이 구시가지의 한 카페.
왜 방콕에서 먹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호기로운 다짐과 달리 실제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달까. 망고가 좋고, 쌀로 만든 달달한 디저트도 좋아하는 나지만 그 두 가지의 조합은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달까.
게다가 흔하디 흔한 방콕 길거리 음식일 거라 생각했던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길에서 좀처럼 보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다. 어쩌면 방콕의 인파와 매연, 더위 때문에 내 뇌가 보고도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한 걸지도 모르지만. 물론 유명한 망고 스티키 라이스 가게가 몇 군데 있어 찾아가려면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었으나 그렇게까지 마주하고 싶은 디저트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언젠가 한 번은 먹겠지, 숙제를 미루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태국에서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더위에 지쳐 들어간 치앙마이 카페 메뉴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나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도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혔고, 무언가에 홀린 듯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주문했다. 마침 배가 고프기도 했으니 먹어보고 정 아니면 다시는 안 먹으면 되니까, 일단 먹어보자- 그런 마음이었다.
이윽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노란 빛깔의 망고 옆에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명백한 쌀이 곁들여진 망고 스티키 라이스가 나왔다. 보기만 해도 달콤한 하얀 시럽도 같이.
그러니까, 망고 스티키 라이스는 실존하는 메뉴였던 거다.
그간의 반복된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제법 익숙한 비주얼이었다. 밥을 티스푼으로 한 숟갈 떠올리고 그 위에 포크로 조심스럽게 떼어낸 망고 한 점을 올려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씹어보았다. 입안 가득 망고향이 퍼지는가 싶더니 짭짤한 밥 위에 뿌려진 코코넛 밀크가 쫀득한 밥과 어우러져 단짠의 황금비율을 만들어냈다.
맛있잖아, 이거!
우려와 달리 너무도 조화로운 맛. 금세 흡족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부드러운 밥 위에 뿌려진 바삭바삭한 곡물의 식감까지 완벽했다. 이런 디저트를 생각해내다니! 필시 망고 맛을 아는 사람, 망고 좀 먹을 줄 아는 사람, 단짠의 연금술사가 확실했다. 누가 처음으로 이렇게 먹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복 받으시라고 연신 감사하고픈 그런 맛이었다.
생과일과 탄수화물을 같이 먹는 생경함과 충격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 순식간에 한 접시를 비우고 망고 스티키 라이스의 맛에 홀딱 반한 나는 그날부터 망고 스티키 라이스 덕후가 됐다. 어디를 가든 망고 스티키 라이스 맛집이 있는지 찾아보고 꼭 들르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망고 스티키 라이스 전문점이 아니고 일반 카페에서 파는 것도 이렇게 맛있는데 유명한 집의 맛은 과연 어떤지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망고 덕후의 태국 여행 버킷 리스트에 '수시로 망고 스티키 라이스 맛집 찾아가 먹어보기'가 추가됐다.
치앙마이에 머물면서 찾은 망고 스티키 라이스 맛집은 '마나 스티키 라이스'.
구시가지 성 안에 위치한 엣치앙마이호텔 1층에 있는 곳이다. 맛있는 망고 스티키 라이스가 있는 곳으로 유명해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망고 스티키 라이스만 즐긴다면 가게 앞 야외에서 먹을 수 있는데, 시원한 곳에서 먹고 싶다면 호텔 1층 카페 안에서 주문을 해도 된다. 그런 경우 호텔 카페 직원이 주문을 받아 밖에 위치한 가게에 주문을 해주는데, 값은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가져다주는 가게 사장님께 직점 치르면 된다.
우리는 호텔 카페에서 책을 읽을 요량으로 간 것이라 망고 스티키 라이스 외에 타일랜드 밀크티도 한 잔 시켰는데, 카페에서 먹는 경우 꼭 음료를 주문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예의상 그게 맞지 않나 싶기는 하다.
시원한 곳에 앉아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먹었다. 확실히 밥의 쫀득함이 남다르다. 미묘하게 처음 먹은 곳과 다른 맛이 나는데, 딱 꼬집을 수는 없어도 훌륭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살아있길 잘했다는 그런 마음이 드는 맛이랄까.
물론 이는 진성 망고 덕후의 간증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맛에 대한 평가가 깐깐한 남편은 먹을만하네, 시크하게 한 마디 했을 뿐이니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무언가를 먹고 맛있다고 말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 남편의 '먹을만하다'는 말은 찬사에 가깝다는 것을. 그러니 망고를 좋아한다면 꼭 한 번 드셔 보시라.
*
망고 스티키 라이스 사랑은 치앙마이에서 다시 방콕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어졌다. 돌아갈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이걸 또 언제 먹겠냐며 1일 1 망.스.라(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멋대로 줄인 말)를 선언하기도 했다.
방콕에서 추천할만한 곳은 커다란 사이즈의 망고와 이곳만의 찰밥 레시피로 방콕 내에서 손꼽힐 만큼 맛있는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만드는 '닝스 망고 스탠드'.
이걸 먹겠다고 방콕의 매연을 마다하지 않고 거리를 헤매 도착했다. 구글맵을 보면서 도로가에서 시장 쪽으로 조금 들어가자 망고가 가득 쌓인 매대가 보였다. 매장 없이 좌판을 깔고 영업하는 곳이지만 큼직한 망고와 넉넉한 인심으로 크게 한 주걱 퍼담아주는 스티키 라이스를 보면 여기가 매연이 가득한 방콕의 길바닥 위라는 사실 쯤은 매우 사소해진다. 온 신경은 다만 능숙하게 망고를 까는 가게 사장님의 손과 샛노란 열대 과일을 향해있을 뿐이다.
방콕 시내의 한 구석에서 마지막이 될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맛있는 디저트를, 한국에서 팔면 대박이 날 텐데(?) 왜 팔지 않는 건가!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손바닥만 한 망고 하나가 5천 원 이상을 호가하는 한국에서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팔면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을 거라는 걸. 슬프지만 그것이 망고가 자라지 않는 땅의 운명인 것이다.
매년 여름 기록적인 폭염에 시달리며 '이럴 거면 망고라도 자라던가!' 외치게 되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달콤한 망고맛을 볼 날은 요원한 것 같다.
분명 이 맛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하며 나는 오감을 동원해 지금 이 순간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
끔찍한 혼종이냐, 의외의 존맛이냐-
어쩌면 태국여행을 앞두고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보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먹기 위해 또다시 태국에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망고 덕후로서, 그리고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사람으로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일단 한 번 잡숴 봐!'
*표시가 된 사진은 freeqration, pixabay 등의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