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일기
요즘은 기분이 어때?
종종 아빠는 '여보세요'란 인사말이 끝나면 이렇게 물어온다. 그때마다 '잘 모르겠다'라고 답한다. 말 그대로 기분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 좋지 않음을 캐치한 아빠는 그럴 때마다 ‘힘내’라는 말을 덧붙이곤 한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즐기면서 지내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취준생이 어떻게 즐겨어...’ 마음의 소리와 함께 통화는 끝이 난다. 통화를 마친 후에야 곰곰이 생각해본다. 요즘 나는 어떨까. 나는 나에게 둔감하고 무심하다.
나는 ‘나’를 보는 게 서투르다. 자기소개서에도 빼놓지 않을 만큼 ‘공감’을 역량이라며 떠벌리지만, 정작 제 몸과 마음 하나 어떤지 잘 모른다. 하루하루를 돌아봤다. 남 얘기라면 하루도 빠짐없이 보고 듣는다. 매일 신문과 뉴스를 보면서 세상 사는 사람들의 소식을 얻는다. 최근엔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으며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들여다봤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나선 어린아이가 겪는 가난에 대해 생각도 해봤다. 그렇게 뉴스, 영화, 책이란 콘텐츠를 매개로 다른 이의 인생 안으로 들어가 본다. 이런 간접체험을 통해서라도 한 뼘씩이나마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한다.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를 살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애써 들여다보지 않기에 자기 이해는 제자리걸음이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가 되면 새삼스레 ‘나’라는 인간을 되돌아본다. 그렇더라도 그건 지나온 인생 경험을 토대로 한 쓸모 찾기에 가깝다. 인생 경험들 안에서 혹은 그 사이사이로 어떤 기분을 느꼈고,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까지 돌아보진 않는다. 당장 쓸만한 이야깃거리를 찾기 바쁘다. 상대에게 나를 선택해달라고 쓰는데 내 기분까지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다. 영화를 보면 인물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책을 읽으면 문장 너머에 있는 마음을 읽어본다. 저 말을 하는 이의 눈은 슬프구나, 공허함에 흔들리고 있구나, 자책하는구나 등 여러 감정이 느껴진다.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깥에서 나를 바라보는 작업이 내게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기분을 살피지 않으면 몸과 마음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만다. 또 한 번 컴퓨터 화면에 ‘불합격’이란 글자를 봤을 때였다. 일순간 화가 났지만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그간 면접 본다고 내팽개쳐뒀던 스터디 모임 과제를 해야 했고, 불합격했으니 다음 계획도 새로이 짜야했다. 지독한 과제형, 계획형 인간인지라 당장 떠오르는 일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으로 보였다. 집중이 잘될 리 없었다. 먹기 싫은 밥을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듯 했다. 과제는 끝냈지만 후련하지 않았다. 할 일을 다 했으니 된 거라며 마음을 외면했다. 채 소화하지 못한 감정은 끝끝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되돌아온다. 예고도 없이 우울감에 나를 빠뜨리고, 이유 모를 컨디션 난조로 이어진다. 내가 외면한 감정이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파고가 되어 밀려온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휩쓸리면서 고된 시간을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내 감정을 무시한 벌이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 누군가 물어 봐주기 전에 내 마음은 내가 챙겨야 한다. 그래야 나를 존중할 수 있다. 사랑한다는 건 다른 게 아닌 것 같다. 상대의 마음이 궁금해 미칠 것 같고, 때론 그 마음과 감정에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 그렇게 나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 꼬박꼬박 일기를 쓴다. 오늘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예정이고 계획으로 넘쳐나던 칸을 이제는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남겨둔다. 무엇을 했느냐보다 그래서 내 마음이 어땠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서투르지만 조금씩 나에게 다가가 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말이다.
코로나19로 불안에 불안이 겹겹이 쌓이는 요즘이다. 그럴수록 마음 돌봄이 필요하다.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을 있는 그대로 읽어주기. 당장 해결되는 건 없어 보여도 그렇게 소화해내고 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오늘 하루 나를 살피는 것부터가 시작이다.